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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ongplate Apr 21. 2021

0 < 죽음

서른이 되면 생기는 일 02






0 < 죽음




나는 방과 후가 되면 놀이터로 직진하던 무리중 하나였다. 해질 때까지 뛰고, 뛰어내리고, 구르고. 그 천진난만했던 체력의 남은 티끌로 꾸려나가는 서른의 퍽퍽한 삶이란 하루 걸러 컨디션 난조를 일으킨다.


어린 나는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다치기는 해도 치명상은 입지 않을 것 같달까. 굴러가는 미끄럼틀에서 서서 내려오다 앞으로 고꾸라져 이마팍에 혹이 생겼는데도 다음 날 또 그러고 있었고, 날아오는 공에 얼굴을 맞아 안경을 세번 정도 부러 먹었는데도 내 최애 스포츠는 피구였다. 아마 그 어린애는 고통과 사고, 죽음 같은 것을 본인이 걱정해야 하는 건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몇달 전에, 정확히는 만 29세의 내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얻은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고,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일이었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한동안 자전거를 못 탔다. 고통과 사고, 죽음 같은 게 이제는 나의 몫이기 때문에. 서른의 나에게 미뤄두었던 죽음의 공포는 이자를 붙여 착실히 할애되었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의 연락이 작년 어느 날 불현듯 끊겼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머리 맞대고 비즈 팔찌나 만들던 애가 연락이 안 되니까, 남은 친구 하나랑 나는 같은 생각에 도달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변고가 닥친 것이니라.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가 성인이 되고 몇년 지나지 않아 투병을 시작하셨다. 나에게 있어 아주머니는 산행을 즐기는 건강한 이미지였는데, 말도 안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가 처음으로 친구의 연락이 끊겼던 시점이었다. 전화도 안 되고 집 근처로 찾아가도 인기척이 없어서 며칠을 발만 구르던 때, 그 자식 성격대로 아주 덤덤하게 사실을 알려왔다.


아주머니는 잘 버티셨다. 젊으셨고, 활기차고, 긍정적이셨고, 가족들도 열심히 그녀의 삶을 보살폈으니 당연히 건강한 날을 누리시는 게 맞았다. 건너 건너에서 나는 종종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잊었지만, 적어도 사람이 그렇게 죄 없이 아플 수는 없는 거고 정성은 분명 통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현저히 떨어지는 풋내기였음으로 나의 친구가 감당했을, 또 아주머니가 감내했을 고통의 1도 사무치게 앓지는 못했다.


친구는 이번에도 여전히 그 차분한 말투로 이래저래해서 엄마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전했다. 우리는 기다리겠다 했고, 근데 얼마 안 있어 네가 보고싶다고 우겨댔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와 만나지 않았다.


친구에게서 먼저 다시 전화가 왔을 때, 그저 기쁘게 통화에 응했던 나의 모습이 제3자의 시선으로 기억된다. 나는 정말이지 활짝 웃었다.


그 전화를 받고나서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친구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저기 멀리서 힘없이 걸어오는 친구를 보며, 그때 비로소 나의 무책임과 무지함과 안일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리 오래 이 애 곁에 있으면서 나는 그녀 어머니의 안부는 몇 번이나 물었던가. 네가 힘들지는 않냐고, 요즘은 어떻냐고 어떻게 궁금해하지 않았던가. 왜 여태 조금의 힘도 보태지 못하고 이제와 후회하는가. 죽음이 우리를 비껴갈 것이라고 어찌 그리 자신했던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녀의 무거운 발걸음마다 질문이 매달렸다.


그제야 나는 죽음이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임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죽음이 질문을 달고 내 코 앞에 당도한 뒤에야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나는 모른다.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다는 것만 이제서야 겨우 알았지, 떠나버린 그녀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도 내 곁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고있는 나의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친구의 앞에서 무심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끊어버리는 모양새가 몇번 반복되어도 나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병과 죽음에 대해 입버릇처럼 내뱉다가 덜컥 입을 다물고 마는 멍청함을 제어할 줄 모른다. 오늘은 한번쯤 그녀의 마음을 묻고 싶어도 그 오늘이 언제인지 모른다.


서른이 되면, 죽음이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최악에는 늘 죽음이 놓여있다. 구체적인 모양으로 죽음을 읽는다. 그러나 막연히 빗장만 열어두고 기다릴 뿐, 그를 맞는 방식은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이제는 눈이 오는 게 싫고, 비가 오는 게 싫다. 건강검진이 싫다. 보험 광고가 싫다. 쉽게 쉽게 등장인물이 죽는 드라마가 싫다.




봄이 돌아온 이곳에서 나는 자전거 퇴근을 시작했다. 넘어진 기억 위로 한겹의 경험치를 덧바르고 달린다. 그리고 나의 친구도 그 옆에서 함께 달린다. 그녀는 나보다는 조금 서툰 주행으로 비틀비틀 하면서도 금방 내 뒤를 좇아 달려온다. 페달을 밟아 나의 옆으로 온다.


우리가 지나오는 길목에는 아주머니를 떠나보냈던 장례식장이 있다. 나는 용기내 물었다. 이곳을 지나면 엄마가 더 많이 생각나지 않냐는 바보같은 나의 질문에, 그녀는 '생각나면 생각하지 뭐.' 하고 대답했다.

나의 친구는 나보다 훨씬 먼저 서른스러운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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