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함에 대한 강박
미디어에서는 인싸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 단어의 어원이 왕따를 의미하는 아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단어가 과연 윤리적인 것인지 의문을 표하게 된다. 그런 부정적인 어원에도 불구하고 인싸템, 인싸놀이 등, 트렌디한 문화의 그룹에 속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무의식을 자극하기에 적절한 단어이기 때문에, 마케팅적 글쓰기를 하는 모든 분야의 필자들에게 사랑받는 단어로 자리 잡아가는 듯하다.
in과 out은 중간항이 없는 이분법적 개념이지만, 인싸와 아싸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인싸는 아니지만 아싸도 아니다. 세상에는 그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 인싸가 긍정적으로, 아싸가 부정적으로 혹은 혐오적으로 사회적인 시선 속에서 인식된다면, 중간항의 사람들은 애초에 인식의 범위에서 멀어져서 투명인간처럼 존재하게 된다. 마치 사회그룹 안에 속하는 방식이 인싸, 아싸, else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중간항의 사람들이 인싸에 도달(?) 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유쾌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싸가 되기 위해선 매력적이거나 혹은 유쾌해야 한다. 한국에서 유쾌함은 대화를 이어나가는 가장 편안하고 필수적인 코드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코드를 읽거나 따라가지 못하면 큰 확률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호명된다. 초, 중, 고 학교생활을 경험하며 형성해 나가는 사회정체성 속에서 유쾌함은 너무 당연한 기조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어느 정도 그 유쾌한 바운더리 안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중학교 동창의 결혼식에서 만난 친구의 유쾌했던 학창 시절 썰을 4시간 동안 들으면서 나는 유쾌함 자체라는 게 내 삶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범주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생각과 내가 초, 중, 고 커뮤티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유쾌함을 가장하면서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미 유쾌한 대화에 질색을 하고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으면 소속될 수 없는 친구들의 무리 안에서 나는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는 주제들에 대해서 웃는 여러 가지 가장을 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유쾌한 우리네 대화는 마치 ‘라디오 스타’ 같다. 술자리든 카페든, 직장인의 모임이든, 동창들의 모임이든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코드와 정서를 다 같이 공유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몇 가지 룰들이 있는데, 그 룰들의 레퍼런스는 라디오스타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에피소드 형식의 일상을 공유할 것
대화의 참여자들은 그동안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꺼내 들어야 한다. 라디오 스타의 출연자들이 재밌는 사연을 준비해 나가지 않으면 혼나는 것과 같다. 이는 전문용어로 ‘썰'이라고 하는 데 썰을 잘 푸는 것만으로도 인싸에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썰은 반드시 사건 위주여야 한다. 그리고 대화의 참여자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썰을 재밌게 풀어야 한다.
둘째. 가벼움을 유지할 것
사건에 수반하는 감정과 느낌과 인상을 공유하려고 하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축 쳐지고 사람들은 지루해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사유와 감정을 공유하는 걸 싫어한다. 영화를 보든 전시를 보든 그것에 대한 인상을 공유하는 것은 어쩔 땐 대화를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을 넘어서 죄악처럼 여겨진다.
어떤 연예인은 자신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부끄럽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무언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마치 많이 아는 사람처럼 비친다는 것이다. 사유와 인상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징검다리 없이 잘난 척이라는 행동으로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에서 겸손함의 추구와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국의 공동체지향적 문화에서 개인의 감정은 지나치게 억압되거나 형식화된다. 형식화되지 못한 불완전한 인상들의 공유가 불편함을 자아내는 이유는 그러한 특수한 의견들이 공동체의 단일의견 혹은 단일감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감각을 중요시한다. 공동체가 마치 한 몸처럼 행위하고 사고하기 위해선, 개인의 특수한 감정과 의견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윤리적인 측면에선 ‘의리’라는 형식의 단체에서만 작동하는 도덕이 작동하고, 감정의 측면에선 유쾌가 등장한다. 우리가 서로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덮기 위해서 유쾌한 하나의 감정으로 모든 사소한 이야기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대화에서 논리와 사고는 소멸하고 남는 것은 큰 목소리와 웃음소리뿐이다. 그 웃음소리 속에는 개인이 사라지고 우리라는 하나의 단체적 성격만 남을 때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있다.
우리는 유쾌하게 떠들지 않고도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방법을 학습해야만 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 의미 있는 대화를 망가트리는 외적인 위협이 저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대화의 늪에서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지적 허영심과 계급주의에 물든 ‘형님'이라는 인물이 대화를 장악하려고 노려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누구나 마음속에 갖고 있는 작은 자기혐오적 감정을 외적혐오적 대상과 무료로 교환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악마도 있다. 대화는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지키고 투쟁해야 하는 가치다.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타자와 나의 관계를 유쾌함의 늪에 빠지지 않고 지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대화를 잘하는 길은 인싸가 되는 길이 아니라 나와 상대가 어떤 벽과 위계적 힘에 쏠리지 않고 자아를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