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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잇 May 14. 2020

스포츠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쓰레기

북리뷰, 우리와 당신들(베어타운 후속작)

당신은 한 마을이 무너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마을이 그랬다.
이 이야기는 베어타운과 그 옆 마을 헤드의 이야기, 두 하키팀 간의 경쟁이 돈과 권력과 생존을 둘러싼 광기 어린 다툼으로 번진 이야기다.
하키장과 그 주변에서 두근대는 모든 심장의 이야기, 인간과 스포츠와 그 둘이 어떤 식으로 번갈아가며 서로를 책임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도 가끔은 착한 짓을 한다. 하지만 나의 착한 짓은 선의 추구가 아니다. 멋의 추구다. 어떤 행동이 멋있다고 생각되면 빠르게 수용한다. 내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 것도, 언젠가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멋이 없는 행동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생기면 기부를 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 조차도, 애초에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더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현대 민주시민의 교양이라는 생각과 그런 교양을 지니는 것이 멋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겉멋 든 사람이지, 선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내 삶의 윤리학은 칸트의 정언명령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더 잘 설명하리라. 선을 추구하겠다는 이성의 판단이기보다는, 멋있고 싶은 욕망의 추동이었으니까. 인간은 욕망이 구체화된 존재라나. 멋에 대한 내 욕망의 추동은 나의 전 삶을 형성하는데, 내가 조금씩이라도 문학을 읽게 된 것도 문학의 '멋'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 '멋'을 '맛'보게 된 것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글을 접하면서다. 문학 작품을 평론하는 그의 섬세한 통찰은 멋있고 싶은 내 욕망을 흔들었다. 그가 문학을 뭐라 했길래?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서문에서


최근에 '베어타운'의 후속작인 '우리와 당신들'을 읽고, 이 서문을 다시 찾아봤다. 벤이를 비롯한 그들의 몰락은 참혹했는데,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의 표정에서 숭고함이 느껴진 것 같아서 신형철의 글이 떠올랐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자들이 “텅 빈 채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형철 선생님이 말한 몰락의 아름다움을 나도 이 책에서 맛본 듯하다.


프레드릭 베크만 저 |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




떨어지는 별똥별이 사라지는 짧은 순간처럼 몰락의 낭만은 보통 순간적이다. 짧은 시간은 고통을 줄여주고, 시간의 유한함과 희소성은 가치를 창조하니까. 하지만 베어타운에서 하키를 둘러싼 몰락의 이야기는 꽤 많은 페이지에 걸쳐서, 꽤 많은 형태로 펼쳐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뻗히고, 어디까지 떨어지려는 건지 그 나락의 늪으로 독자를 빠뜨리고 괴롭힌다. 마치 수천 개의 별똥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라지지 않고 지구를 향해 계속 떨어지는 공포랄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이야기가 곤두박질칠 때는, 마치 결론 나지 않은 연재물을 읽는 듯 작가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려고!?" 프레드릭 베크만을 걱정하다니.. 내가 경솔했다. 그는 역시 (이야기) 꾼이었다. 본인이 벌린 일은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었다.


몰락하는 자들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으면, 이 대규모의 몰락이 지키고자 했던 한 가지는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베어타운으로 다시(후속작이니까) 가보자.


아나가 쓰러져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기만 하자 마야가 단짝 친구를 꼭 끌어안고 귀에 대고 속삭인다.
“생존자야, 아나. 생존자. 우리는 생존자야..




훌륭한 소설이 늘 그러하듯, 전작 ‘베어타운’이 그랬듯, ‘우리와 당신들’도 우리의 고착화된 가치관을 흔들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이 다루는 정치, 경제, 폭력, 공동체, 소수자, 인권 등의 영역에서 도출되는 질문들을 정리하면 도덕철학 입문서의 목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철학책보다 문학이 뛰어난 점은 현실이 그러하듯 이 모든 문제들을 비현실적으로 따로 떼어놓고 논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가는 서사는 오히려 직관적으로 우리의 공감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특히 프레드릭 베크만이 창조하는 등장인물들은 문학의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동화책보다 만화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에게는 오로지 글로만 묘사되는 캐릭터를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내지 못한다. 하지만 베크만의 글로 빚은 캐릭터는 금방 그려낼 수 있으리라. ‘우리와 당신들’에 등장하는 꽤 많은 캐릭터들은 한 명 한 명 구체적으로 우리 머릿속에 실재하게 된다. 스웨덴과 아이스하키라는 낯선 배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 금방 친해져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게 된다. 심지어 베크만이 얘기하지 않은 그들의 감정까지 추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논의를 가지런히 정리하려는 도덕 철학책보다,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가는 ‘우리와 당신들’ 이야기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서사를 전개하는 등장인물들과 금방 친해지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극단스럽게 다른 여려 인물들 속에 전부 내가 담겨있다.




그래서 두 권에 걸치는 이 긴 서사가 결국 도착하는 곳은 다시 스포츠다. 이 몰락하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스포츠가 있다. 사실 우리는 스포츠를 둘러싼 비극을 현실에서 이미 마주했다. 나라를 뒤집어 놓은 대입 비리 사건이나 권위를 이용한 착취, 성폭행 사건들, 이 중심에 스포츠가 있지 않았나. 소위 엘리트스포츠라는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여러 병폐와 "폐쇄적 문화"로 대표되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20여 년간 계속해서 드러나고, 계속해서 변하지 않고 있다.


 끊기 어려운 병폐에 대한 논의는 보통 체육특기자제도(1973)에서 시작한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체육특기자제도는 당시 군부정권이 국가 선전을 위해 스포츠와 국민을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만든 전체주의의 산물이다. 현재 체육계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폐단은 체육특기자제도에서 발전한 형태로서 설명이 가능하다. 지금  설명을 하려는  아니고,  같은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결국에 봉착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스포츠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들은 결국 이 같은 본질 추문을 하게 된다.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 진리가 세워지면 그것이 다양한 상황을 분별해주는 하나의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 보편의 존엄성이 분별의 원칙이 되어준다. 매춘은 왜 불법일까? 착취적 시장 구조의 맥락을 제거하고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벌기 원하고, 또 한 사람은 돈을 지불하고 성적 쾌락을 얻고 싶다면 이 둘의 거래는 상호 이익이며 제3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 거래가 몸을 파는 사람의 인권을 해친다면, 스스로 몸을 팔고자 하는 그 사람의 선택 자유권 또한 보장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다소 어려워 보이지만 존엄성의 원칙을 대입하면 문제없다. 모든 인간은 존엄한 존재로서, 타인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을 착취할 수 없다. 심지어는 스스로 타인의 수단이 될 수도 없다. 존엄성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누군가의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의 존엄성이 훼손되면 인간 전체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개인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는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려는 행위도 막아야 하지만, 스스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도 막아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갈등을 사실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흡연하겠다는 사람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유는 타인의 건강권을 침해하기 때문이고, 존엄성을 기준으로 건강권이 흡연권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학생선수에게 학업을 권고하는 것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을 선택권보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위한 학습권이 존엄성을 지키는데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권이라는 개념 역시 문명의 산물이고 시대적, 지역적 합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인권적 선택이 절대적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인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존엄성이라는 대답처럼, 스포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은 오늘날 스포츠계의 많은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원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스포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려는 시도는 물론 많았다. 지금도 이렇게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생 때는 제도화가 스포츠의 주된 특징이라고 배웠다. 그런가 하면, 몸의 대근육을 사용해야 스포츠라는 해부학적 관점으로 스포츠를 정의하기도 하고,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예측 불가능성을 스포츠의 본질로 여기기도 한다. 스포츠가 교육적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지만, 경쟁을 부추기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스포츠의 본질을 설명할 만한 모종의 원칙을 정하기 어려우니, 스포츠가 어디까지인지 선을 긋기도 어렵다. 바둑이나 e스포츠를 스포츠로 여길 것인가? e스포츠가 스포츠라면 또 어떤 게임까지인가? 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인데 왜 무용은 스포츠가 아닌가?




600쪽짜리 장편소설 2권에 걸친 긴 이야기의 중심에 스포츠를 두고서, 프레드릭 베크만은 스포츠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스포츠를 설명하지 않는 방법으로 스포츠를 설명한다. 베어타운은 몰락하면서 "스포츠를 둘러싼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켰다." 이 참혹한 몰락은 결국 스포츠를 둘러싸고 있는 쓰레기를 벗겨낸다. 그래서 모든 걸 잃은 그들의 표정은 모든 걸 지킨 듯 숭고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벗겨내고 애초에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들만 남기면 단순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
다들 스틱 하나씩 들고. 골문 두 개를 두고. 두 팀으로 나눠서. 우리 대 당신들.


어쩌면 스포츠는 불변의 절대적 모양으로 정할 수 없는 유동적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포츠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정하는 것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쓰레기를 벗겨내는 일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신형철은 이어서 말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이 질문은 윤리학의 질문이 아닌가. -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서문에서

그래서 문학은 몰락의 윤리학, 몰락의 에티카다. 그리고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은 "몰락의 스포츠 에티카"다. 몰락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니까.


어떤 스포츠가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스포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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