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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잇 Apr 12. 2020

"수영하는 사람들은 꽃잎처럼 물 위에 떠 있다."

북리뷰, 수영하는 여자들

오랜만에 영혼까지 따듯해지는 작품을 만나서 즐겁게 읽었다. 요즘은 책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스마트폰만 열면 단숨에 마음을 빼앗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무한대로 나타난다. 그래도 역시 이런 따듯한 소설에 마음 빼앗기는 것만 못하다. 마음 따듯할 일 드물고, 심지어 차가운(Cool) 것이 보편의 ‘멋’인 시대에, 종종 이런 책 앞에서 마음 데워야 좀비가 되지 않으리라.


리피 페이지 저  | 박성혜 옮김 | 구픽 | 2018



수영하는 두 여인


대도시 런던이 그랬는지, 잘난 사람투성이의 대학원이 그랬는지, 삭막한 사회생활이 그랬는지 ‘마치 자기 인생이 차를 몰고 떠나는데 자기는 그 뒤에 끌려가면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긁히는 것만 같은’ 스물여섯 살 케이트는 아무도 모르게 공황장애를 앓고 있으며 지역 신문사에서 아무도 읽지 않는 집 나간 반려동물 실종 기사를 쓰고 있다. 

나약함에 젖어있던 그녀에게 드디어 기사다운 기사를 쓸 기회가 찾아왔다. 시 의회가 부동산 회사에 넘기기로 하면서 폐쇄 위기에 놓인 브릭스턴의 오래된 리도(야외 수영장)에 관한 기획 기사를 연재하게 된 것이다. 

기사를 시작하기 위해 케이트는 브록웰 리도에 대해서 가장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며 소개받은 여든여섯 살 로즈메리를 만나게 된다. 로즈메리는 본능적으로 기자를 경계하지만, 여든여섯 생의 혜안 앞에 드러난 케이트의 나약함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제안한다.


“인터뷰할게요. 당신이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수영부터 먼저 해요. 그러고 나서 날짜를 정하죠. 일단 수영을 다녀오고 나면 연락해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자전거 타는 것과 비슷해요. 수영하는 법을 잊어버리진 않았을 거예요.”


하마터면 거절할 뻔했지만 케이트는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수영복을 사러 가는 것부터가 큰 도전인 그녀에게 수영 한 번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그녀는 공황 발작을 피할 길이 없다. 수영장 탈의실이지만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이 그녀에겐 두려운 일이다. 큰 어려움에도 기어코 케이트는 수영장 데크 앞에 섰다. 그리고,


“물의 차가움은 케이트의 심장을 뛰게 한다. 그 두근거림은 피와 발가락과 젖꼭지를 따라 느껴진다. 
케이트는 외마디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수면 아래로 쑥 들어간다.
물이 케이트를 확 덮쳐오고 곧이어 고요함이 흐른다. 
앞으로 쭉 뻗어 푸른 물을 향하고 있는 두 손이 창백해 보인다.
다시 발차기하고 난 다음, 두 팔을 끌어당기면서 수면 위로 올라간다. 
물방울이 튀고 거침없이 즐거워하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케이트는 다시 물속으로 잠긴다. 고요함이 케이트에게 안도감을 선사한다. 
차츰 물 온도에 익숙해지고 리듬을 되찾으면서 심장 박동도 약간 느려진다.”

“차가움은 견디기 괴롭지만, 정신을 깨운다. 피부가 오싹하다. 
오랫동안 무감각했던 이후의 감각이다. 케이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수영한다. 
… 
케이트는 자신이 우아하거나 강인하지 못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수영하고 있다. 
그리고 물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 
“케이트의 머리 위로 하늘이 탁 트여 있다. 잠시간 완벽한 자유를 느낀다. 
몸을 돌려 누워서 배영을 시도한다. 여기저기로 오가는 새들이 보인다. 
리도 건물 주위 나무들의 나뭇가지 위에 돋아난 봄 새싹이 바람에 흔들린다. 
잠시 수영을 멈추고 둥실 떠 있다. 
오랜만에 몸을 편안한 상태로 둔다. 물이 그녀를 붙잡아주고 있다. 깊게 숨을 쉰다.
뺨 근처에서 물이 찰랑거린다. 거의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괜찮았다.”


그저 기사를 쓰려던 것이었는데… 차가운 물속에서 케이트는 직감적으로 알았을까? 그녀는 왠지 로즈메리를 도와 리도를 지켜야 할 것 같다. 여든여섯 살 친구 로즈메리와 수영을 만난 케이트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까? 케이트에게 불쑥 수영을 권한 이 비범한 노인, 로즈메리는 이 리도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재개발에 의해 원주민이 생활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룬 흔한 이야기가 될 뻔한 이 소설은 수영이라는 스포츠를 더하면서 특별한 소설이 되었다. 영화 제작도 예정된, 유쾌하고 따듯한, 수영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당신도 꼭 만나보길!



스포츠는 정복의 대상이 아닌 쉴 만한 안식처


처음에는 이 책을 스포츠 문학 장르라고 여겨도 될지, 그래서 학생선수들에게 소개해도 좋을지 고민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수영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흔히 스포츠 문학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것도 꼭 절정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경쟁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수영이라는 스포츠가 한 개인 케이트의 삶에, 로즈메리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격렬한 한 경기의 순간이 아니라.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책을 꼭 소개해주고 싶었다. 경기장에서의 스포츠가 아니라 삶에서의 스포츠, 어쩌면 스포츠를 꽤나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거나, 경시하거나, 누리지 못하는 스포츠의 더 놀라운 일면일지도 모른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 다시금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여태까지 나에게 스포츠란 정복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스포츠를 하나씩 익히는 일은 늘 즐거웠다. 축구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스노보드를 배우고. 그렇게 한 종목씩, 그리고 더 높은 수준으로 한 단계씩 정복해 나가는 것이 나에게 스포츠였다. 그러나 로즈메리에게 수영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쉴만한 안식처이며, 그녀를 안아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로즈메리는 수영장 물이 그녀의 몸을 감싸 오자 그제야 자신이 하루 종일 계속 서 있느라 얼마나 애쓰며 정신을 집중했는지 깨달았다. 몸을 뒤로 기대어 그대로 둥실 떠가도록 두었다. 차가운 물이 마치 그녀의 몸을 붙드는 손처럼,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가락처럼 느껴졌다.
물이 귓속으로, 얼굴 위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스스로를 울게 놔두었다. 
로즈메리는 몸을 물 위에 띄운 채 하늘과 옆에서 놀던 아이들이 던져 올린 공을 바라보았다. 
평생 로즈메리를 지켜봐 준 커다란 벽시계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케이트에게는 그녀를 지켜주는 아빠이자 늘 내 편인 친구 같은 존재였다.


“차가운 물 위에 떠 있을 때면 마치 자기 자신이라는 감각과 모든 근심거리까지도 멀리 떠가는 것만 같다. 물속에서 케이트는 케이트가 아니다. 그저 물과 하늘에 둘러싸이고 보호받는 하나의 몸일 뿐이다. 물은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 

“케이트는 수영장 데크의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있는 공황 발작의 존재를 상상해본다. 수영하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안심한다. ‘여기서는 날 덮칠 수 없을걸.’ 케이트는 물속으로 쑥 들어가며 생각한다. 차가운 기운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녀를 감싸 안는다.”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엄마, 아빠, 친구로서의 스포츠라. 나에게는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보통 스포츠가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즐거움이나 극도의 긴장에서 오는 짜릿함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스포츠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안아주기도 한다(한단다). 스포츠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있단다). 늘 수영이 정복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가끔 가만히 안겨보기를(나부터…).



스포츠에 대한 저마다의 의미


수영 선수들은 올림픽 경기에서 최고 수준의 접영으로 물을 헤쳐 나갈 때 그 높은 수준의 경기력과 경쟁에서 어떤 쾌감을 느낄 것이다. 한편, 오늘도 직장에서 최악의 하루를 보낸 한 스물여섯 살 여성은 퇴근 후 동네 수영장을 찾았다. 누가 봐도 엉성한 나선형 발차기로 느리게 물을 가르며, 힘이 들지만, 역설적이게도 평안을 느낀다. 어떤 수영이 더 수준 높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기능 수준이 높아야만 스포츠의 정수를 누릴 수 있다’는 내 생각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순간에 놓이게 되었다. 

수영 선수가 느낀 것이 물을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경쟁하는 데서 나온 유희적 즐거움이라면, 직장인 여성이 느낀 것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혹시 그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숭고’나 동양에서 말하는 ‘물아일체’와 같은 건 아닐까? 유한한 수영장에서 무한한 자연을 느끼는 순간. 나의 판단 능력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 느낌에 넋이 나가는 순간. 그 거대함 앞에 일상의 문제들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순간.(너무 나갔나)

그러고 보니 운동 중에 단순한 유희를 넘어서는 어떤 느낌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이미 있다. 운동 오르가즘이라 불리는 ‘러너스하이(Runner’s High)’또는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은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둘 다 지속적인 운동 중에 나타나는 어떤 초월적인 느낌이나 상태를 말한다.


“참 역설적이라고, 케이트는 차가운 물속에서 혼자 수영하며 생각한다. 상황이 최악인 이 순간에 이토록 잔잔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아마 이것이 리도에서의 마지막 수영이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하지만 물이 주는 느낌, 물 위로 내리비치는 햇빛, 바로 이곳에서 느끼는 단순한 기쁨이 그녀를 다시금 꽉 붙잡아준다.”


여하튼 내가 ‘수영하는 여자들’을 읽으며 떠올랐던 성찰적 고민을 정리하면 이렇다. “국가대표 수영선수가 여든여섯의 할머니보다 더 빠른 수영은 하겠지만, 반드시 더 깊은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 높은 수준의 기량이나 치열한 경쟁에서 느끼는 즐거움 말고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스포츠를 통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로받을 수 있고, 평안할 수 있고, 숭고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스포츠는 여가 시간에 찾는 오락거리가 될 수도 있는가 하면, 일상을 지탱해주는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한테 왜 수영하냐고 묻는 건 
왜 아침에 일어나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대답은 똑같답니다.”


새롭게 다시 만나는 스포츠


나는 최근에 세 번째 십자인대 재건술을 했다. 세 번째니까 재재재건술이다. 세 번 다 축구하다가 다쳤다. 이번엔 그나마 멀쩡했던 연골까지 찢어졌다. 다치는 순간 엄청 아팠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다시는 축구화 신을 일이 없겠다는 직감이 수백 배 더 고통스러웠다. 축구뿐이랴, 대부분의 스포츠도 이전처럼 즐기지 못할 거란 직감은 나를 마치 바나나의 멸종을 마주한 원숭이 한 마리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스포츠의 다른 면모를 누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격렬하게 스포츠를 하지 않고서도 누리를 수 있는 즐거움. 그것이 ‘숭고’ 건 ‘물아일체’ 건 ‘러너스 하이’ 건 ‘몰입’이건 간에 말이다. 경쟁의 대상이 아닌, 날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존재로서 만나는 스포츠. 어쩌면 이제야 스포츠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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