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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균 Aug 02. 2024

9. 민족에 대하여 (아테네)

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

1. 무명용사의 묘에 서서

ΜΙΑ ΚΛΙΝΗ ΚΕΝΗ ΦΕΡΕΤΑΙ ΕΣΤΡΩΜΕΝΗ ΤΩΝ ΑΦΑΝΩΝ
찾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빈 상여가 있다.
ΑΝΔΡΩΝ ΕΠΙΦΑΝΩΝ ΠΑΣΑ ΓΗ ΤΑΦΟΣ
온 세상이 영웅들의 무덤이다.   

그리스 무명용사의 묘에 쓰여있는 문구들이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따온 구절들이라 한다. 그 옆으로 작은 글씨로 오늘날의 그리스 군인이 전사한 모든 전장을 써놓았다. 오른쪽 한구석에 쓰여있는 지명이 눈에 띈다. <ΚΟΡΕΑ>. 한국이다. 그리스는 6.25 전쟁에 1개 대대와 수송 편대를 파병한 역사가 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그 무명용사의 묘 옆이었다. 그 위치가 어쩌면 당연했다. 헌법이 반포되어 그 이름을 딴 신타그마(Συντάγμα) 광장이 가까웠다. 광장에서 서면 지금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왕궁과 무명용사의 묘가 한눈에 보였다. 주변도 주요 관공서가 모여있는 장소이자 관광객이 몰려드는 번화가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한 시간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이루어졌다. 우리도 시간이 맞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군인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경호부대 소속이다. 독립전쟁 당시 정예병이었던 에브조네스(ΕύζΩνες) 복장을 예복으로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군기가 엄정했다.

그리스 무명 용사의 묘와 근위병 @ 촬영

교대식을 구경하면서 사실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란 책이었다. 물론 적절하지 않긴 했다. 다른 나라의 국가적 의례를 보며 떠올린 게 민족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명저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의 시작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근대 내셔널리즘 문화의 상징으로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무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 일부러 비워 놓았거나 누가 그 안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명용사의 기념비와 무덤에 공식적으로 의례적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일찍이 그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나남출판, p.29   

저자는 이렇게 무덤을 지어 자신들 스스로 기리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떠올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무명의 그리스인, 독일인, 한국인을 위한 텅 빈 무덤은 있다. 하지만 무명 자유주의자들의 무덤 같은 것은 없다. 그렇기에 민족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그는 민족을 일종의 종교로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민족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 기억되기 위한 공동체다.   

한국에 돌아와 신혼집 주변 도서관에 처음 방문했다. 도서관 카드를 발급받으니 새로운 도시의 주민으로 진정 인정받은 것 같다. 처음으로 빌린 책은 <상상의 공동체>였다. 대학 시절 젠체하느라 읽어 남은 게 없었다. 이번에는 여행에서 느끼고 생각한 걸 보충하기 위해 다시금 읽었다. 그제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상의 공동체>는 참으로 오해가 많은 책이다. 물론 원래 고전이란 모두 읽은 척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 농담하긴 한다. 하지만 이 책처럼 유독 들은 것과 직접 읽을 때 다른 내용을 보게 되는 책은 흔치 않다.   

단연코 민족이란 건 거짓부렁이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쉽게 이야기하면 공동체란 건 본래 상상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국가도, 민족도, 계급도, 심지어는 어쩌면 가족까지도. 상상의 산물이라고 해서 거짓이란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왜 사람들이 그런 공동체를 상상하는지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민족이란 걸 차라리 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중세인들은 심판의 날이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믿었다. 심판을 기다리기에 인생과 죽음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종교적 시간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우리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공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도대체 인생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되어야 했다.   

저자는 다음의 문구를 재인용하여 민족사(民族史)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법관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역사다. 죽은 자를 –로마법에서 이 가엾은 인생들이라고 표현했던 죽은자들-은 역사의 심판자가 뒤처리를 해주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역사가로서의 나의 이력에 있어서 나는 역사가의 이러한 의무를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그들의 가족이고 친구인양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같은 책,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 재인용   

그렇기에 민족은 글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신문과 역사서,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나아가는 방향과 지난 일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개인 삶의 여정을 누군가 함께 하고 있다는데 위안을 얻는다.   

인터넷에서 바로 검색해보니 그리스에서 무명용사의 묘를 만들기로 한 건 1926년이라 한다. 처음 이 연도를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스-터키 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종전 조약에 의해서 대규모 인구교환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같은 나라에 이웃으로 살던 사람들이었다. 바다 건너에 살던 그리스인 130만 명이 고향을 떠나 난생처음 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대로는 50만 명이 그리스 땅을 떠났다.   

하지만 섞여 살던 사람들에게 민족 정체성이 있을 리 없었다. 종교와 언어가 기준이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삶이 그렇게 재단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빈털터리가 되어 그리스로 들어온 인구는 전체 인구의 1/3에 달했다.   

아테네에서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가이드의 친가가 이렇게 할아버지 대에 고향을 떠난 실향민 가족이었다. 지금도 그 집안 소시지를 맛보면 그 출신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가난으로 값싼 고기를 향신료에 절여 먹었던 흔적이다. 한국인으로서 그 이야기를 듣고 이북 출신들의 냉면과 만두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2차원으로 표현한 아테네 지도 @ 촬영

분단된 나라에서 살면서 민족은 어려운 주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아직 반으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은 익숙해지면서도 가끔은 낯설다. 언젠가 정말로 통일이 도둑처럼 찾아온다면 우리도 그리스처럼 재빨리 무명용사의 묘를 만들게 될까? 그렇다면 그곳에는 누구를 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 세대에서 민족을 말하는 건 약간은 창피한 일이 되었다. 시대에 맞지 않거나, 촌스러운 일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건 부모님 세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엔더슨의 말대로 민족이 신문과 역사서, 소설 같은 글에 바탕을 둔 공동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우리는 어떤 공통의 글을 보지 않는다. 각각의 취향에 맞게 알고리즘이 조율해준 소셜미디어와 동영상을 본다. 북녘땅에 사는 동포보다 내 취향 공동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어떤 학자들은 미래의 모습을 신중세(新中世)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근대가 민족을 만드는 시기였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반대로 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세인들이 스스로 어떤 민족의 일부가 아니라 지역, 종교, 길드에 속해있다고 느낀 것처럼. 나와 이제 막 결혼해서 생긴 내 가족은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진 첫 세대가 될지 모른다.   


2. 그리스어 첫걸음

그렇게 민족과 역사라는 거대 담론을 오랜만에 고민하자 이번 신혼여행 동안의 작은 경험이 떠오른다. 그리스 여행을 가기 한참 전부터 시작한 공부가 있다. 과목은 자그마치 그리스어다. 책 한 권을 우직하게 끝마치는 것이 목표였다. 거금을 들여 인터넷 강의도 결제했다. 물어물어 가사를 외워봄 직한 그리스어 노래들도 찾아두었다.   

여행을 마친 지금 시점에서 내 그리스어 실력을 평가하자면, 대실패였다. 사실 어느 여행지를 가기 전에 기초 회화는 외워둔 적이 있어서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놓친 것이 있었다. 직장인으로서 공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리 실용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외국어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핑계는 있다. 그리스어는 문법이 정말 차원이 다르게 어려웠다. 무엇이든 곁가지로 갈수록 단순하고 본류는 어렵기 마련이다. 그리스어는 인도-유럽어의 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이 제일 어려워한다는 단어의 성별, 수, 격을 맞추는 문법이 꽤 골칫거리다. 성별은 남성, 여성, 중성 세 가지인데다가 형용사와 부사도 모두 불규칙하게 변한다. 이런 언어의 특징이 배울 때는 어렵고 실력이 생기면 쉽다고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학 기호로도 쓰이는 그리스어 자모는 익숙해져서 여행 갈 수 있었던 점이다. 까막눈이 되는 일은 면했다. 뜻은 모르지만 읽을 수는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여행하면서 미천한 그리스어 실력이 도움이 되는 일이 꽤 있었다. 어떻게 음식점 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또 정교회 성당에 가서는 성화(聖畫)들에 그려져 있는 성인들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혹시나 신도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까 봐 얼굴 그림 옆에 이름을 크게 써두었기 때문이다.

정교회 성당 천장성화 @ 촬영

그렇게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 질투 나는 일도 있다. 수천 년이 넘어가는 유물들에도 옛 그리스어가 쓰여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현재에 쓰는 글자로 조상들의 유산을 바로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순 한글로 쓰는 시대가 된 지 채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영혼이 독일어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영혼이 한국어로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영혼의 바탕이 될 글은 겨우 채 백 년이 되지 않는 시간 안에 갇혀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민족 개념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 있을 수도 있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말하듯 민족이 글에 기반한 이루어진 공동체라면 한글의 백 년만이 우리를 정의한다. 저자는 한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베트남의 꾸옥응으(國語. Quốc Ngữ)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꾸옥응으가 의식적으로 장려되었다. 이 문자는 중국과의 연결을 끊고 왕조 기록과 고대 문헌을 베트남의 새 세대들이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토착적인 과거와의 연결을 끊으려고 의식적으로 장려된 것이다. 
같은 책, P.164   

이 문장에서 ‘베트남’을 ‘한국’으로, ‘꾸옥응으’를 ‘한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자에서 벗어나 한글을 사용하는 건 민족이 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내 부모님 성함을 한자로 쓰지 못한다. 궁이나 절을 가도 혹은 박물관에서 고서를 보아도 읽을 수 있는 게 없다. 대학 시절 선생님께서는 본관을 한자로 쓰지 못하니 까막눈과 다름없다고 일갈하셨다.   

물론 세상에는 배워야 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당장 지금 한문을 시작하느니 영어나 코딩을 배우는 것이 내 성장을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나와 역사 사이의 단절을 알게 되니 그 아쉬움이 커진다. 30대에는 늦었지만, 틈틈이 한문을 공부하는 생활도 그려본다.   

물론 이번 그리스어 공부를 통해 배웠지만 어른이 되어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어를 시작할 마음가짐이었다면 못할 것은 무엇이냐는 생각도 한다. 결국 내 반년 동안 그리스어 공부는 한문 공부 다짐이라는 독특한 교훈으로 끝나게 되었다.   


3. 아테네와 그리스를 떠나며

여행 막바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고대인들은 이 언덕에 신들이 거한다고 믿었다.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다. 아크로폴리스는 흔히들 그리스에 오면 맨 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의 마지막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높은 바위 위에 오르니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크로폴리스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 아테네 @ 촬영

그리스가 독립했을 때, 성도(聖都)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지 못했다. 그곳은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미 오백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인들은 자기들만의 도읍을 새로이 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신생국가의 수도로 아테네가 선택되었다. 당시 이곳은 폐허가 된 유적들이 널브러진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사실상 19세기의 신도시였다. 하지만 역사적 정통성만은 탁월했다. 야사(野史)지만 독일 출신이었던 초대 국왕의 그리스 고고학 취미 역시도 아테네를 수도로 삼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 아테네란 도시는 고대인의 유산 덕분에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오직 아테네란 도시뿐만 그러할까? 사실 어느 민족이나 나라든 옛사람들의 폐허 위에서 상상력을 덧붙이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면서 맥수지탄(麥秀之嘆)을 읊은 길재의 시조를 떠올렸다고 한다. 국문과 아내를 둔 데 새삼 감동하였다.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 촬영


이번 신혼여행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보았다. 3주는 적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에, 그리스를 구석구석 탐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를 크게 돌았다. 바다와 섬들로 시작하여 산과 수도원을 지나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그때 먹었던 음식들과 보았던 풍경들과 피부로 느꼈던 공기를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혼여행은 답사가 아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목적은 없다. 하지만 난 결혼이라는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을 막 지나온 서른 살 새신랑이었다. 인생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라는 공간을 만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스는 마치 퍼즐처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나라였다. 지나치는 강과 산, 그리고 에게해의 섬들이 모두 신화를 품고 있었다. 또 수천 년 역사의 흔적도 어디서든 찾을 수 있었다. 신혼여행을 같이 했던 책 몇 권이 덕분에 더 즐거웠다. 오랜만에 철학서와 역사서를 읽을 수 있었다. 순전히 나를 위한 독서는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거기서 깨달았다.   

지금 신혼집 냉장고는 그리스 기념품 마그네틱들이 잔뜩 붙어있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 나 역시 그리스란 나라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전도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사랑하게 된 나라를 떠나는 것은 늘 마음에 아팠다. 하지만 여행은 결국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기에 아테네 국제공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여행이 끝났지만, 신혼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경유지로 택한 두바이에서 이틀을 보냈다. 경유지는 스쳐 지나가는 곳이라 생각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미래풍 사막 도시에 내려 몇 시간 안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좋은 여행지였다. 덕분에 나의 글도 다음 약간의 여분이 더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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