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에서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혹여 누가 일본 당일치기 소도시 관광지를 물어본다면, 나는 시모노세키를 추천하고 싶다. 둘러볼 곳들이 모두 걸어갈 수 있는데 그 역사도 뜻깊다.
우선 시모노세키 여행은 어디서 시작하더라도 가라토(唐戶) 수산 시장을 꼭 거치기 마련이다. 이곳은 주말마다 초밥 좌판이 열리기에 유명해졌다고 한다. 바로 즉석에서 물고기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 주면 노상에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시간은 평일 아침. 따라서 그저 조용한 장터였을 뿐이었다. 덕분에 바다를 옆에 낀 공원에서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벤치에 홀로 앉아 바다 반대편을 바라보면 규슈섬이 보인다. 과거 이 시모노세키가 항구로서 번창했을 무렵, 덕분에 반대편 규슈의 모지코도 부항(副港)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산업구조의 변화로 지금은 오히려 규슈 쪽이 더 큰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 둘을 잇는 간몬교(関門橋)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를 건너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바닷가 공원에서 러닝을 뛰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건강한 도시인 모양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목적했던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기대했었다면 실망했을 터였다. 그저 기념비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땅을 정비하면서 조각난 자투리땅에 설치한 모양. 만약에 안내서를 보면서 찾지 않았다면 쉽게 지나쳤을 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비석에는 일본어와 한글과 영어로 각각 글이 쓰여있었는데, 그 내용이 제법 감명 깊었다.
지금,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선린우호의 사귐을 더욱 깊게 구축해야 할 때 조선통신사와 역사적 의의를 재인식 하고자 일행상륙의 이곳에 기념비를 세워 그 역사를 길이길이 현창(顯彰)하고자 한다.
2001년에 한일의원연맹 회장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직접 비문을 썼다고 한다. 서예에 제법 조예가 깊었고 달필로 명성이 자자했다는데, 그 글씨를 문외한에 불과한 내가 봐서는 잘 모르겠다.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키겠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일본 측과 청구권 관련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다. 물론 지금은 독도와 식민지 배상 문제에 있어서 해결 난항의 근원이 된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다.
그 이후로도 나라가 민주화되고 정권이 바뀌면서도 김종필은 경력을 이어갔다. 과가 많은 정치인이다. 그리고 매번 결정적인 한일관계에 있어 일종의 소방수 역할을 자처해 왔다. 풍류와 취미를 즐기는 사람으로도 유명해 동아시아권 외교에서는 평이 좋았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와서 조선통신사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일종의 여행 A/S다. 여행을 여행지에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녀온 다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책을 통해 복습하고 다시금 떠올린다. 지금도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을 다시 살펴본다. 조선통신사라는 주제다 보니 역사적 한일관계 전반을 다루는 내용이 많았다. 나도 덕분에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한번 이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국제정치나 외교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닐지라도 일본은 충분히 재미있는 화두다. 일개 소시민이 나에게도 그렇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하고 있단 사실은 말하기에 입이 아프다. 문화적 교류 역시 그렇다. 일본이란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이제 개인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조선통신사는 그런 점에서 좋은 생각의 물꼬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새로이 일본의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금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기를 요구했다. 아마도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조선 측에서도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귀환 문제와 관련해서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사신이 파견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은 전국시대였기에 각각의 세력들이 조선에 마구잡이로 사신을 파견했다. 조선은 손님을 대접한다는 예법에 맞게 이들을 대우했고 사실상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인들의 한양 상경은 금지되었다. 그 방문 루트가 침공에 이용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통치자 쇼군이 있는 에도까지 매번 왕래했다. 마지막 사실상 유명무실이 되어 쓰시마까지만 갔었던 12번째를 제외하고는 11번의 조선통신사들이 이곳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갔다. 최대 총인원이 500명에 달했으니 엄청난 규모였을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200년 동안의 평화를 생각해 봄 직하다. 물론 어쩌면 동아시아 전체가 잠겨있었던 200년의 쇄국(鎖國)으로 낮춰볼 수도 있겠지만. 17~18세기 우리 조상들의 세계는 그렇게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해안 쪽으로 닿아있는 공원의 도로 반대편에는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이 눈에 띈다. 조선통신사들은 그렇게 부산에서 출발해 바다를 넘어 이곳에 도착한 다음, 바로 이곳에서 묵으며 여독을 풀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나의 이번 여행처럼 크루즈를 타고 하룻밤 사이 쉽게 올 수 있었겠지만, 당시 양반들은 꽤 뱃멀미로 고생했을 것이다.
사실 통신사들이 남겼던 무수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곳의 이름은 원래 아미타사(阿彌陀寺), 그러니까 불교 절이었다.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폐불훼석(廃仏毀釈) 때문이다. 즉, 메이지 유신 이후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한다는 정책하에 지금은 완연한 일본 신도 사당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메이지 유신은 근대화 운동이기도 했지만 나름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앞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니 빨간 문이 제법 인상적이다. 이 빨간 문이 아카마 신사가 아니라 신궁이라고 불리는 이유라고 한다. 오직 천황을 모신 사당만이 궁(宮)이라고 불릴 수 있고, 빨간 도리이 문을 세울 수 있으며, 천황가 문장인 국화 문양을 쓸 수 있다.
이곳 아카마 신궁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안토쿠(安徳) 천황이다. 사당에 들어서면서 안내표에 어떤 아이와 할머니 캐릭터가 맞아준다. 바로 어린 천황과 그 외할머니 니이노아마다.
일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 한다. 겐페이 합전(源平合戦)이라 하여 천하를 두고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 가문이 싸우게 되었다. 각각 가문은 자신들의 천황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세웠다. 당시 6살이었던 안토쿠 천황은 여기서 헤이지 가문이 지지하는 천황이었다. 흔히 설명하길 헤이지 가문은 사치스럽고 무예를 게을리했지만, 겐지 가문은 훈련하며 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생겨난 말일 것이다.
그 내전의 마지막 무대가 바로 단노우라(壇ノ浦), 지금의 시모노세키다. 바다에서 양쪽의 해군은 맞붙었고 처음에는 헤이지 가문이 유리했지만, 어느새 간몬해협의 물살이 바뀌었다. 그렇게 최후의 승자는 겐지 가문이 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그렇게 승패가 분명해지자 외할머니였던 니이노아마는 어린 손자 천황을 안고 뱃머리 위에 섰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어린 손자에게 외할머니는 “행복한 곳입니다. 바다 밑에도 궁전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그를 품에 안고 물속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 어린 천황을 기리기 위한 곳이 아카마 신궁이다. 또 그를 위해 죽은 헤이지 가문 무사들의 명패도 봉해져 있었다.
이 이야기에 조선통신사들도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곳에 묵으면 관련된 시 한 수 남기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그들의 왕을 위해 바다에 빠져 죽었던 무사들의 충(忠)을 예찬했다.
신사 뒤로 돌아갔다. 늘 생각하지만, 일본의 숲은 뭔가 으스스하다. 하늘로 뻗어있는 삼나무 숲과 땅바닥의 이끼들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 숲 안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카마 신궁 구석에 가니 그런 숲 가운데 자그마한 사당이 있다. “귀 없는 호이치” 상이다.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괴담집에서 볼 법하다. 비파를 잘 연주하는 호이치라는 눈이 안 보이는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귀신에 씌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그를 걱정하여 온몸에 불경을 써주었는데, 딱 하나 놓친 곳이 그의 귀였다고 한다. 그날 밤 다시 귀신이 나타났고 불경이 쓰인 몸은 차마 건드릴 수가 없자 귀만 잘라갔다. 알고 보니 그 귀신이 안토쿠 천황을 위해 죽은 헤이지 가문 무사더라 이런 이야기다.
온몸에 불경을 써넣는 그 이미지가 강렬해 이미 예전부터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이후 수많은 공포 영화가 오마주 했는데 그 계보에 우리나라의 <파묘>가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알고 음산한 사당 앞에 서니 기분이 이상하다. 게다가 분위기를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지 스피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구간 반복으로 틀어주고 있다. 비도 조금씩 내리고 하늘도 흐렸다. 어쩔 수 없이 일본 엔화 잔돈을 조금 꺼내어 복전함에 넣고 향을 꺼내어 피웠다.
여기 사람들이 안토쿠 천황을 기리는 것을 보며 단종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도 단종과 관련된 전설들이 참으로 많다. 작은아버지였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유배 떠나 죽음에 이르게 된 그의 삶을 민중은 안타까워하고 애도했다. 역사는 승리자가 기록하는 것이지만, 패배자들은 전설과 귀신이 되어 우리에게 남는다.
내가 이 단노우라 전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닌 과학책 <코스모스>다.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이 지역 특산 게를 예로 들었다. 바로 ‘헤이케 게’라고 불리는 종으로 등딱지에 화난 무사의 얼굴이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시 전설에는 억울하게 죽은 헤이지 가문 무사들의 영혼이 환생한 것이란다. 이를 칼 세이건은 어부들이 기분 나쁘게 생긴 게를 먹지 않고 살려줬기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인위선택이 일어난 것으로 설명했다.
물론 지금은 과학적으로 기각된 가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헤이케 게’가 화난 무사의 얼굴을 등껍질에 달고 살게 된 것은 완전히 우연의 소산이다. 그저 기분 나쁜 등딱지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여행 중 다시금 떠올린 곳이 있었다. 바로 시모노세키의 유명한 수족관인 카이쿄칸(海響館)이다. 이 작은 지방 도시의 자랑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내용이 화려하다. 특히 일본 최대급이라는 펭귄 전시시설은 구경하는 맛이 있다. 그 외에도 간몬해협의 해양 생태계를 주제로 심화한 전시가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 문제의 헤이케 게였다.
그렇게 물고기를 구경하며 서 있자 옆으로 예쁘게 유치원복을 입은 꼬마들이 줄을 서 지나갔다. 평일인데도 유모차를 끌고 찾아온 가족 방문객도 많았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가끔 해외 어디를 가든 그곳의 유명하다는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방문하곤 한다. 이번에도 시모노세키에 와서 수족관에 올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다 보니 고유한 개성들이 눈에 띄곤 한다. 카이쿄칸의 경우에는 해외의 진귀한 물고기보다는 지역색이 강한 물고기들을 전시하며, 건물도 주변의 경관을 강조하고 있었다. 메인 수족관 중 하나를 바라보자, 그 뒤편에 칸몬교가 펼쳐진 모습은 탄성을 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선호하는 취미는 늘 어느 정도 양심의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 장소에 가는 것이지만, 과연 이 동물들이 행복한지 고민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도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열악한 환경에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물의 행복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그나마 믿을 만한 기준은 AZA(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 인증인데, 국내에서는 주요 동물원도 이 인증을 겨우 통과했다. 심지어 수족관은 아직 사례가 없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가 이 동물복지 부분에서 뒤쳐있느냐 하면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아시아권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인증을 받는 곳이 우리나라가 최초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두가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동물원과 수족관이 갖는 불가피함과 타협하는 중이다. 역설적으로 전문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곳이 동물원과 수족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복을 위해서 고민해 볼 문제다.
그런데 이곳 카이쿄칸에 오니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바로 ‘돌고래쇼’다. 한국에서는 근래에 들어서 이 문제가 국민의 담론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미 서울대공원의 돌고래쇼는 끝났고 이후 차례대로 제주도 바다에 방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전 공연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것이고, 그 성과도 아직 작다.
그런데 그런 사이 나에게 벌써 일본에서의 돌고래 공연이 불편해졌나 보다. 물론 똑똑한 돌고래들과 물개들의 재롱이 귀엽기는 하다. 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해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카이쿄칸에서 돌고래와 펭귄들 말고도 주요하게 볼거리가 있다. 바로 복어다. 이곳에는 전 세계 모든 복어 종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참고했던 어느 여행 후기에 의하면 “수족관의 반이 복어밖에 없다”라고 과장되게 표현했을 정도로 주요한 물고기이기도 하다. 전망을 구경할 수 있는 쉼터에서도 디스플레이에는 계속해서 시모노세키와 복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시모노세키는 복어의 도시다. 정말 길거리를 걸으며 어디서든 복어 상징물을 찾을 수 있었다. 보통 특산물에 대한 지자체의 애착은 한국에서도 있지만, 이곳의 복어 사랑은 약간은 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복어는 시모노세키뿐 아니라 야마구치현 전체의 자랑이기도 하다. 언어로도 이 점이 나타나는데, 이 지역 사투리로 복어를 ‘후쿠(ふく)’라고 한다. 이는 복(福)과 발음이 같아서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한국어에서도 복어가 정확히 같아서 재밌는 부분이다. 반대로 복어의 원래 일본어 표준 발음은 ‘후구(ふぐ)’로 불우(不遇)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잘 못 먹으면 죽는 음식이라 그런지 생겨난 말장난들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내가 방문했을 무렵 야마구치현은 미국의 어느 신문이 세계 3대 여행지로 손꼽아 준 기념인지, ‘후쿠의 땅’이라며 대대적인 관광 홍보 중이었다. 정말 복어 사랑이 지극하다.
놀랍게도 복어 이야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로 이어진다. 복요리와 관련된 인물을 뽑자면 저 둘을 뺄 수가 없다. 둘 다 한국과도 깊이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이 지역의 특징으로도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하에 16만의 군대가 조선을 침공한다. 그런데 규슈에 집결한 군대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병사들이 계속 복어를 먹고 죽는 사고가 나는 것이다. 전국 통일이 이제 막 완수되어 일본 곳곳에서 군대가 모일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지역 생선은 먹어보고는 싶고 그런데 손질할 기술은 없다. 그러다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어를 먹는 자는 엄하게 벌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글을 모르는 병사들에게 복어 그림을 보여주고, 이렇게 생긴 생선은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 이후로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 에도 시대가 되어도 복어 금지령은 계속되었다. 자그마치 300년 동안의 금지였다.
물론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는 복어를 계속 몰래 먹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유지이자 이 지역 출신인 요시다 쇼인도 관련하여 이야기하기도 했다. 불식하돈설(不食河豚説)이라는 글에서 그는 사무라이가 복어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무라이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불명예만큼은 두려워해야 하는데 복어를 먹다 죽는 것은 개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 차후 권력을 잡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로, 차후 복어 금지령을 300년 만에 해제한다. 사실 그렇기에 야마구치 현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권을 잡고 고향과 가까운 시모노세키에 다시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는 어느 정자를 보고 반해 이름을 슌판로(春汎樓)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곳은 나중에 여관이 되어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런데 야사에 의하면 슌판로에서 어느 날 총리대신 히로부미가 왔는데도 내놓을 생선이 없어 고민하다가 복어를 요리해서 내놨다고 한다. 그 맛에 반해 버린 그는 1888년 야마구치현만 예외적으로 복요리를 해금(解禁)하고, 이곳 슌판로를 제1호 복요리 식당으로 정했다고 한다.
물론 그도 당연히 이 지역 사람일 테니 복요리를 처음 먹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고향 음식에 대한 편애였을 것이다. 그런데 슌판로라는 식당은 아직 있어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시모노세키 여행 코스로서 슌판로라는 식당은 그 안까지는 들어가 보기 쉽지 않다. 나 역시 그저 들은 이야기지만 가격이 적잖이 비싸다고 한다. 게다가 숙박도 겸하고 있는데 방도 많지 않아 일단 예약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제1호 복요리 식당의 음식은 먹어보지는 못 해도, 관광차 가 볼 만하다. 왜냐하면 그 슌판로는 청일전쟁의 끝냈던 시모노세키 조약이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단골식당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원래 있던 식당 건물은 미군 폭격에 불타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청일강화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예전 그 건물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복원하고 당시 유물들을 보관 전시한 곳이다.
영업 중인 슌판로 식당 앞이라 박물관으로 가는 길인지 갸웃하긴 했다. 들어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다른 관람객들이 몇몇 눈에 띈다. 놀랍게도 모두 젊은 중국인들이었다. 일본인이나 나 같은 한국인도 없었다. 청일전쟁과 그 종전인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 관점에서 치욕스러운 역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중국 젊은이들은 이곳을 굳이 찾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약 상대방이었던 이홍장을 보며 그들을 무슨 생각을 할지 싶었다.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에 있어서도 운명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당장 시모노세키 조약문 제1조는 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은 해외로 나온 것이 인생 처음이었다. 사실상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강화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생 사업이었던 청나라 북양함대는 일본군에 의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조선의 임오군란 때문에 발생했던 위기를 막기 위해 10년 전 톈진조약을 맺었기에 상대방인 이토 히로부미와는 구면이었다. 둘은 모두 통역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 속 일국을 이끄는 정치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들도 서로에게 묘한 인간적 호감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내세운 강화 조건은 가혹했다. 어쩔 수 없이 첫날 협상은 난항으로 끝났다. 그런데 숙소인 인조지(引接寺)로 가던 이홍장에게 20대 일본 극우파 청년이 암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이미 노인인 청나라 실권자를 일본으로 직접 부른 것에 국제여론이 좋지 못한데, 암살 시도까지 있어 일본의 체면이 크게 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안경에 맞아 미수로 끝났다. 일본 천황이 직접 살펴 이홍장에게 의사를 보내기까지 했고 일본 국민이 쓴 위문편지가 속속 도착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 역시 묘한 일본만의 국민성이다. 어쨌든 덕분에 서둘러 강화조약이 맺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슌판로에서 숙소 인조지까지 이홍장은 이후 암살을 피해 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곳을 이홍장 길이라고 부른다. 뭐, 나 역시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걸어보았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 어려운 골목이었다. 차도 올라오기 어려운 집들 사이로 작은 아스팔트 길이 하나 있는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산동네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오히려 그 점이 놀라웠다. 좀 있으니 제 몸을 핥고 있던 깜장 고양이가 날 보고 놀라 도망갔다. 아무래도 인적이 많은 길은 아닌 모양이다. 관광 안내서에는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길이라고 쓰여있는데 완전 새빨간 거짓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지에 도착했다. 사실 관광지가 될 정도로 큰 절도 아니고 동네 조그마한 사찰에 가까웠다. 뒤편으로 묘지들이 빼곡해 일본다운 느낌은 들었다.
인조지 역시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이야기는 그렇게 돌고 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끝난 것은 조선이나 류큐, 베트남이 속해있던 조공 질서였다. 청나라에 방토(邦土)로 묶여있던 조선은 그렇게 갑자기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젊은 중국인들이 아까 그 청일강화기념관을 찾아 아픈 역사를 곱씹었듯이 나 역시 관련된 내 나라 역사를 생각하며 걸었다.
하루 종일 산책을 하고 나니, 시모노세키란 도시는 제법 인상적이었다. 많은 관광 후기를 보면 이곳을 그저 어느 오래된 중소도시로 평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약간의 애착이 생겼다. 물론 화려하거나 신기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 전체에서 풍기는 옛 항구의 느낌이 무언가 향수를 자극한다.
그래, 놓칠 수는 없다. 복어는 살이 튼튼하기에 저미듯이 뜰 수 있다. 그래서 담은 그릇의 색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얇은 회가 제일이란다. 나도 이 지역의 특산물이라는 복어회를 저녁 식당에서 하나 주문했다. 역시 만만찮은 가격이었지만 여행 중 이 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한 입 먹어보니 그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나는 맛에 문외한이다. 다른 하얀 생선회와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결국 그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사치라더니. 시모노세키 여행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