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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Oct 06. 2022

대학원생과 망각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 -스콧. A. 스몰

 누구에게나 망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부정적일 확률이 높다. 특히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원이라는 공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대학원생에겐 망각은 공포의 대상이다. 안 그래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지식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그나마 가지고 있는 소박한 지식마저 잊어버린다면 그것만큼 좌절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 망각하면 떠오르는 이런 1차원적인 공포심이 스콧. A. 스몰 선생님이 쓰신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라는 대중 과학서적을 읽고 싶은 동기가 되어주었다.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망각에 집중하며 무언가를 잊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심어주려는 시도 자체가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논문이나 서적을 읽을 때마다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가 마치 사진 찍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됐으면 싶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해당 지식이 필요할 때마다 머릿속에 찍어둔 사진 데이터에서 출력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이런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책의 서두에서는 마치 사진을 찍는 것 같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언급해주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사진 같은 기억력을 활용하는 건 말 그대로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이나 가질 법한 초능력이고 실제 기억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필요할 때만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대도시의 발전이 사람들의 지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 풍경은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전기의 보급으로 등장한 전등은 시종 밝게 세상을 비추며 낮과 밤의 변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지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벤야민이 활동한 20세기 초반에 비하면 현대인들에게 앞서 언급한 정도의 상황은 충격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서울 강남 한복판 넓은 사거리에 서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길 건너 약속 장소로 가야 한다. 이때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신호등의 신호와, 차량의 움직임,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 도로의 상태 등을 파악한 후 길을 걷는다. 여기에 더해 현대인은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한 채 길을 걷기도 한다. 이것이 무슨 충격이냐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뇌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상황마다 분명히 지각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충격에 무덤덤할까? 이 책을 읽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망각이 완충 작용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망각 능력이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길을 한번 건너는 것만으로 과거의 수많은 충격들을 떠올리고 익숙한 방법으로만 길을 건너려고 할 것이다. 그 와중에 가해지는 새로운 충격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혹시나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길을 건너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릴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한 생활 속 예시이지만, 이 상황만 봐도 정상적으로 망각한다는 게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


 이외에도 기억이 새로운 사고를 방해한다는 주장과 이에 따라 기억과 정상적 망각이 균형을 이루어야 창의성이 더욱 발현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가슴을 울렸다. 많은 것을 기억할수록 그것에 익숙해지고 다른 방향으로 사고가 뻗어나갈 수 없다는 것에 공감했다. '1+1 =?'이라는 간단한 수식을 모르는 성인은 없다.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2다. 사람들은 이 명확한 수식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수식을 배운 기억이 없다면? 정말 유치한 장난 같고 다소 과장된 예시일 수도 있지만 '1+1 = 창문(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이 모든 것을 하나의 선의 기호로 본다면 충분히 연상할 수 있는 답변이다. 포괄적으로 적용시키기엔 다소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새로운 것을 사고하기 위해서 망각할 필요성이 있다.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소논문이나 과제로 글을 쓰다 보면 이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경험적 지식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다소 시간이 흐른 뒤에 대학원에 입학한 나의 기억력이 감퇴했다며 자책하곤 했다. 하지만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면 자책하지 않을 생각이다. 망각은 나를 위해서도 중요하고 정상적인 과정이다. 오히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자세가 내 삶에 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매 순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할 지식들과 사투하는 대학원생에게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삶에 중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큰 위로가 되어준다.


 더불어 매번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었는데, 책에서 저자는 잠의 수수께끼를 망각으로 풀어낸다. 우리가 잠을 자는 것도 낮에 받은 수많은 충격을 밤에 영리한 망각으로 완충하는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지혜인가. 잠을 자는 시간을 아까워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푹 자고 모든 충격을 잊어버린 채로 다음날 건강하게 새로운 사고를 이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오늘부터 기억보다 망각에 힘쓰고 더 많은 시간을 잠에 쏟으려고 애쓰진 않겠지만, 적어도 하루에 3분의 1 정도의 시간을 죄책감 없이 잠에 투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어제 수업 때 배운 것을 잊어버리거나 때로는 조금 늦잠을 자도 앞으로 더 새롭고 좋은 사고를 하기 위한 일종의 추진력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조급한 대학원생처럼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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