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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Dec 24. 2019

이런, 배가 너무 고프다

배가 고파서... 살고 싶다

한동안 식욕이 없었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은 프로틴바 하나로 때웠다. 주변 사람들은 "그러다 쓰러져요." 하며 식사량을 늘릴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인간을 대하는 것 자체가 벌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와 마주하고 식사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그러나 식욕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단 이유만으로 아예 아무 것도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나에게는 챙겨야 할 식구(고양이)도 있으니. 집사의 본분을 지키려면 밥도 잘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감자도 캐고, 사랑도 주어야 했다.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하려면 연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식욕도 식욕인데 다른 욕구도 함께 사라졌다. 물욕이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분기별로 고가의 상품을 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가끔은 그게 아우터나 목도리일 때도 있고 비싼 스피커나 청소기인 경우도 있다. 근데 사사분기가 된 10월에도 좀체 아무 것도 사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몸무게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약 한 달여 기간 동안 도합 5kg 정도가 빠졌다. 못 먹은 것도 못 먹은 건데 일이 너무 많은 탓에 야근을 밥 먹듯ㅡ진짜 밥이라도 먹으면서 했으면 모르겠는데ㅡ했다. 다니는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의 공식 명칭이다)에 가서 내 상태를 이야기 했다. 오랜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은 내 핏기 없고 푸석한 안색을 살피더니 "진저 씨가 느끼기에 지금 뭐가 가장 필요한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휴식을 말했다. 아무리 다른 길을 모색하려 해 보아도 휴식 외에는 답이 없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으면 있는 대로 일을 시킬 조직이었다. 비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자리를 빼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4개월 이상 장기로 나의 예후를 본 의사는 내게 휴직을 처방했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지금 한 달째 휴직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몇 개월이 더 남았지만, 나는 사실 한 달이면 피로에 절은 육체가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이라고 확신했다. 휴직과 동시에 병원에 가서 비타민 주사도 맞고 건강검진도 해서 몸에 있던 잔병을 찾아내 그에 대한 처치를 했다. 하지만   무너진 건강은 하루이틀,   정도의 휴식으로 완치되지 않았다 


나는 쉬는 동안 신생아처럼 밀린 잠만 잤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 정도가 내가 하는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가끔 직장에서 '나에 대한 걱정을 동반한 동향 파악'을 위해 연락을 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처음 몇 주뿐이었다. 조직의 부품이었던 나는 금세 잊혀질 존재였다. 뭐 그럴 걸 알고 있었다. 이게 첫 직장이 아니었으니.


휴직 후 드라마틱한 신체 변화를 기대했던 나는 곧 실망했다. 주치의에게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반쯤 원망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웃으면서 "아직 일주일밖에 안 쉬었잖아요. 하고 싶었던 거 시작해 보고 휴직 기간을 잘 활용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빨간 캡슐에 든 식욕 증진제를 항우울제의 틈에 끼워 넣었다.



나는 꾸준하기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일부러 야채도 먹겠다고 쌈채소를 뭉터기로 샀다. 입맛이 여전히 없는 것 같더니 막상 고기를 구워 쌈을 싸 먹으니 몇 그릇이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밥도 밥이거니와 평소에 질색하는 유탕면도 먹고, 그동안 찬장과 냉장고에 비축되어 있던 통조림류와 인스턴트 식품이 전부다 거덜이 날 지경이었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다리 달린 건 책상이고 의자고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운이 나고 배가 불러 오니까 운동을 할 생각이 들었다. 원래 수영을 매일매일 했을 정도로 물개인데 일이 바빠지면서 아예 못 하게 됐다(그러는 바람에 우울감이 더 커졌는지도).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를 골라 집 근처 수영장에 가서 먹은 걸 소화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몇 랩이고 장거리 수영을 했다.


수영은 유산소 운동이자 팔다리 근육 발달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라 자꾸 하다 보면 기초대사량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잠을 자고 일어나면 많이 먹은 것이 무색하게 몸무게가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걸 선순환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잘 먹고, 또 운동을 하고, 또 잠을 잤다. 휴직 한 달, 나는 집에서 노는 주제에 세 끼를 다 먹는 식충이가 돼 있었다. 물론 내 손으로 차려 먹는 것이긴 하다만.



글의 흐름상 조금 뜬금없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각은 새벽 3시경이다. 잘 자다가 깨어 버렸다. 배가 고파서. 저녁을 거른 탓이다. 거른다고 거른 건 아닌데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냥 잠들었다. 거르지 말았어야 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급한 대로 쌀국수를 끓여 먹었다. 그리고 그 먹은 값을 하려고 이렇게 랩탑 앞에 앉았다.


내 몸으로 임상실험을 해 본 결과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 욕구'는 '생의 욕구'와 직결된다. '짐승이 곡기를 끊으면 죽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아, 갑자기 스쳐가는 장면이 있다.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약 6개월간 거의 제대로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모든 음식을 허기를 지울 정도로만 드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 보면 그건 스스로 생을 깎아 먹는 일이었다.


식욕이 생긴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먹고 싶은  찾아 먹고, 갖고 싶은 것을 욕망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난다. 매일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모든 욕망이 식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없다. ,  모든 문제가 병원에서 처방해   빨간약, 그거  알이면 해결될 거였다니 조금 허탈하다.


음.. 조금 비약적일 수 있으나, 나이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손아랫사람들 끼니를 챙기는 이유를 이제는 좀 알겠다. '같이 살자고, 잘 살자고'. 살아있는 사람들 간에 권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다정한 제안이 '식사'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건 그렇고, 다시 잠에 들기엔 아직 배가 고프다. 에어프라이어에 호.....를 굽는다. 먹보는 이렇게 작은 것에도 행복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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