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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Jul 24. 2023

(의도치 않게) 입이 참 무거운 사람

학부 시절 몇 개월 간 어학연수를 떠난 적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인재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단 하나 '영어'만이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라 생각했다. 나보다 성적도 나쁘고 상식도 부족한 해외파 친구가 영어로 몇 마디 하면 '우와' 하는 분위기에 사실 배알이 꼬였다. 영어가 뭐라고. 그냥 도구잖아. 나도 하면 되겠지. 그래서 부모님을 설득해 미국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문법과 읽기 실력은 나쁘지 않았기에 어학원에서 본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높은 반에 배정이 됐다. 높은 반이니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바도 컸다. 새로 입학한 내게 질문이 쏟아졌는데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 듣겠더라. 내 발음대로 어떻게 얘기를 했는데 교사도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 수업이 끝나고 당장 담당자에게 가서 더 낮은 반으로 배정해 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좀만 버티면 나아질 테니 그 반에 좀 더 있어 보는 게 어떻겠냐 했다. 나는 그냥 바꿔 달라 했다. 낮은 반에 가니까 또 거긴 너무 쉬웠다. 너무 쉬워서 도움이 하나도 안 됐다. 친구만 잔뜩 사귀었다. 나보다 말을 못하는 친구들과 말을 별로 안 하고 낄낄 대면서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어학연수였다. 그게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에서 응시한 토익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 돈을 들여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토익점수를 얻었구나.. 그래,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후 3년 쯤 뒤 치른 공무원 영어 시험에서는 만점을 맞았다. 수험생들은 나를 영어의 신처럼 모셨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재미 삼아 전화 영어를 할 때도 신나게 필리핀에 있는 이름 모를 선생님과 포켓몬고에서 무슨 포켓몬을 잡았는지 그 일과를 털어놓았다. 가끔 내한가수의 콘서트에서 영어로 인삿말을 전하는 아티스트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고 만족해 했다. 해외여행을 가서 호텔 체크인이나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할 때 막힘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착각했다. 



착각, 그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나 스스로 충분히 유능하다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막을 켜고 미드를 보는 주제에 내가 저절로 다 이해한 것이라 생각했다. 구글 번역기의 손을 거쳤으면서도 내가 쓴 글이 군더더기 없다고 믿었다. 영어를 잘한다는 건 궁극적으로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사실 내가 접한 모든 영어 상용의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다 내가 돈을 주고 지불하는 구매자의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돈을 쓰는 사람이니까 상대방은 내가 알아듣기 쉬운 표현과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맞춰서 말했을 것이다. 



2023년 7월 현재 기준으로 영어권 국가로 이주한 지 1년이 훨씬 지났다. 여기선 아무래도 내가 아쉬운 입장이다. 내가 상대방의 의중을 잘 파악해서 거기 맞는 말을 던져줘야 한다. 듣기평가처럼 들어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왔다갔다 핑퐁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몹시 괴롭다. 개뿔 못 알아 들었을 때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거나 때론 다 이해한다는 듯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는다. 말수가 절로 줄어든다. 나를 입이 너무 무거운 사람, 너무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난 재미있고 유쾌하게 말하는 사람이고 싶은데 현실과의 간극 때문에 좌절한다. 원어민은 말이 너무 빠르고 자기들만 익숙한 표현을 써서,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액센트가 너무 세서.. 저마다의 이유로 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게다가 무슨 표현을 써야 상대방의 오해를 사지 않고,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상대방이 받앋들일 만한, 문화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느라 말이 입밖으로 차마 안 나온다. 처음에야 '시간이 들겠지, 기다려 보자' 했지만 이젠 그러기엔 시간도 많이 흐른 것 같다. 영어일기를 써 볼까, 뭐 볼 때 한글 자막을 꺼 볼까. 안 해본 게 없다. 근데 왜..



한 번은 브라질 출신 친구가 네이티브급으로 영어를 아주 잘해서 물었다. "넌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해?" 그 친구는 뭘 그런 걸 다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랬다. "많이 연습을 했으니까 그러지" 아.. 연습. 나도 안 하는 건 아닌데.. 이봐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했다고. 근데 왜 난 모국어처럼 안 되냔 말이야.. (mute)



지금 이 시간에도 영어를 쓰기보다 한국어로 넋두리를 적고 있는 내가 참 답이 없다. 굉장한 인공지능 번역기가 등장해서 헤드폰을 착용한 채 내 모국어로 말만 하면 상대방의 언어로 통역이 되는 게 뉴노멀인 그런 세상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기술의 발전이 나를 이 영어 늪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머지 않은 미래일 테지. 



그렇지만 아직은 별 수가 없다. 일단 한국드라마를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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