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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May 05. 2020

스마트폰 내려놓기 연습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아이의 눈빛을 볼 시간,  지금 뿐이야.

  그동안 스마트폰을 멀리하고자 참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육아 2년 차에는 카카오스토리를 탈퇴했고, 육아 3년 차에는 카톡을 탈퇴했으며, 육아 4년 차에는 스마트폰을 아예 폴더폰으로 갈아타 보기도 했었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도통 빠져나오기 힘든 ‘늪’과도 같은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고자 무던히도 발버둥 쳤다.



  TV도 시간이 아까워 안보는 나인데, 스마트폰에 황금 같은 시간을 저당 잡힌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불편하게 다가왔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정신이 분산되어 그 시간이 온전히 행복하지 못했으며, 그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물리적으로 환경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에 폴더폰으로도 바꾸어봤고 카톡 탈퇴도 해 보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오픈하기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이 전보다 오히려 더 늘었고 단체 카톡방은 더더욱 많아졌다.



  예전에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자 노력하고 실천하던 그 시기에 나와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부름에 즉각 답할 수 있었고 아이들의 눈빛을 조금 더 볼 수 있었고 조금 더 그 순간에 집중하며 즐길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켕김’이 없었고 아이들이 밉지 않았고, 책을 더 많이 읽었고 잠을 더 잘 잤다. 그런데 최근의 내 모습은 어떠했는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곧 아이를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이를 ‘보아야’ 아이를 알 수 있다. 그래야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양육, 보육, 교육은 ‘본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이를 자꾸 어디로 보내는 것으로, 맡기는 것으로, 돈으로 보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대신하지 말라.

- 편해문 선생님의 강의 중에서 -   


  편해문 선생님은 이 ‘본다’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며 강조를 많이 하셨다. 강의 내내 ‘아이를 잘 보고 있지 않은 우리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고 안타까워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나의 하루를 다시 되돌아본다. 아이들을 보고 있어야 할 그 시선과 관심이 스마트폰과 카톡, 블로그에 온통 빼앗기고 있지는 않았는지. 카톡에 답을 해야 하고, 블로그 글을 완성해야 하고, 댓글을 달아야 하고, 검색을 해야 하는 바쁜 엄마. 이렇게 나의 시선이 계속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는 통에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있지만 계속 엄마가 그립고 엄마가 고프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나의 ‘소셜 활동’을 방해하며 나에게 도통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아이들이 미워지지나 않았는지.



  너무나 즐겁고 나에게 꿈과 힐링을 안겨주던 블로그조차도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행복 충만한 나의 삶이 자연스레 글쓰기를 끌고 와야 당연할 진데, 포스팅에 대한 강박은 도리어 ‘글이 삶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노트에 하루 한쪽 글을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한 편 남기는 것은 노트 한쪽과는 차원이 다른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물론 그 시간과 에너지만큼 나는 더 성장할 것이다. 그런데 딱 그 시간과 에너지만큼 아이들이 나의 시선과 관심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아닌지, 딱 그만큼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이 덜 행복했던 것은 아닌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지 않노라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 첫째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왜 내가 이야기할 때 계속 핸드폰만 봐?”

 “아 그랬어?”

 “저번에 차에서도 내가 말하는데 엄마는 핸드폰만 보고 자꾸 ‘잠깐만’이라고 이야기하고.”     

  순간 아찔해졌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항상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엄마’가 자리 잡으면 어쩌나.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갖게 되었을 때, 나는 그때 가서 무슨 명분으로 아이에게 ‘자제력’을 논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이가 “엄마도 늘 핸드폰 끼고 살잖아요.”라고 말하는 날엔 쥐구멍이라도 찾을 수밖에.



 지금 이 순간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결단이 필요했다. 나의 결심과 의지력이 도통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환경의 통제밖에 방법이 없다. 눈앞에 안 보여야 하고 내 손에 없어야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실천으로 각종 SNS 앱을 하나의 폴더에 담아 가장 구석진 자리에 배치했다. 핸드폰의 첫 화면에는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내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는 앱(전화, 문자, 캘린더, 카메라, 갤러리, 지도, 티맵, 메모장)만 남겼다.



  두 번째 실천으로 핸드폰에서 카톡 앱을 삭제했다. 탈퇴도 해봤다가 무수히 지웠다 설치했다를 반복했던 애증의 카톡. 탈퇴를 하니 생각보다 단체 속에서 불편한 점이 많이 생겨서 결국 재가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으로 핸드폰 앱을 삭제하고 컴퓨터에 PC 카톡만 깔아놓고 수개월을 써 보았더니, 선물 주고받기를 할 때나 사진을 전송할 때를 제외하고는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다.



 최근 들어 카톡을 다시 지우고 나자 핸드폰으로부터 내 마음이 상당히 자유로워짐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블로그 포스팅도 강박 없이 여유롭게 하고 있다 보니 핸드폰을 들여다볼 일이 더더욱 없게 되었다.




  날씨 좋은 날 동네 산책을 하다가 세 아이와 함께 조용한 카페에 들렀다. 막내는 유모차에 재워 놓고, 나는 커피 마시며 책을 읽고, 첫째와 둘째는 그림을 그리며 놀고, 그러다 또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었다가 함께 책도 읽었다가 종이접기도 했다가, 거의 3시간을 참으로 평화롭게 보냈다. 핸드폰은 친정아버지의 전화를 받을 때 빼고는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첫째가 “엄마,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야.”라고 했다. 나 역시도 같은 기분이었다.



  요즘 육아관이 잘 맞는 친구들, 지인들을 만나면 우리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요즘은 대세가 그러니 어쩔 수 없어.”라는 흔한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엄마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그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론은 하나다. 엄마의 삶으로 아이에게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어 주는 것.



  아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모습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나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답해 주고 나의 눈을 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 있었던 일, 힘들었던 일, 속상했던 일들을 시시콜콜 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나부터 아이들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아이들의 눈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힘든지 알아채기 위해 성심을 다해 아이를 ‘보는’ 것이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나를 원하고 찾을 때, 엄마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낼 때, 그 부름과 신호에 보다 따뜻하게 응답해주기 위해서 나는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아날로그에 조금 더 가까워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종이책을 읽고, 노트에 필사하며 글을 쓰고, 스케치북에 아이디어와 계획을 쓰고, 캘리그라피로 마음을 나누고, 전화통화로 안부를 묻고. 그렇게 모두가 디지털을 향해 달려갈 때 나는 거꾸로 한 번 달려보기로 한다.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보낼 수 있는 이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평생을 그리워할 소중한 시간이기에, 더 늦기 전에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굳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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