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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고 Dec 30. 2021

가짜 모범생

대학원이 필수과정이면 안 되나요.

    나는 항상  나오는 김연아 선수를, 박태환 선수를 부러워했다. 내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가 김연아 선수가 항상 아사다 마오 선수랑 붙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열심히 봤고  좁은 자취방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응원했다. 아사다 마오가 잘하면 방음이 두텁지 않은  자취방에서는 환호하는   일본인들의 함성이 들려왔고 김연아가 잘하면 질세라  크게 응원했다. (한일전을 일본에서 보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그 두 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열심히 꾸준히 한 결과 세계 정상에 섰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부모가 준 기회와 본인의 타고난 기질과 능력이 합해져서 아이스 스케이팅, 수영 불모지인 우리나라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수라니… 너무 멋지다. (물론 그들의 속내는 그들만이 아는 것이지만…) 티비에 나오는 그런 선수만이 아니다. 내 하나뿐인 사촌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방송작가 등 조금씩 바뀔 때도 있었지만 항상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간직해왔다. 그 결과, 사범대에 갔고 임용고시에 합격해 지금 아주 행복한 중학교 선생님이다.


    분명히 부모님이 나에게 많은 기회를   같은데 나에게 뚜렷하게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엄마가 국제변호사가 멋있다고 말하면 국제변호사가 되고 싶다 말했고 UN기구 같은 데서 일하면 멋있을  같다 해서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스스로 꿈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냥  앞에 하나하나 과제들을 클리어 해나 가며 남한테 욕먹지 않고 대다수에 뒤쳐지는 불안을 느끼지 않으며 부모님의 얼굴에 근심 가득한 표정이 나오지 않도록 눈치 보며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라캉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바이올린을 권해 열심히 켰다. 나름 열심히 연습했지만 클래식 음악에 단 한 번도 크게 심취하거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하길 바라니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나름 전공 아닌 전공을 했다. 내 실력은 아주 잘하지도 아주 못하지도 않았다. 공부도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열심히 했다. 엄마가 과외를 시켜주면 열심히 했고 학원에 등록을 하면 숙제 밀리는 일 없이 열심히 했다.


    돈이 흘러넘쳐서 보내준 유학이 아니기에 부모님이 실망하지 않을 결과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좋은 대학의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경제학과를 지원한 것도 그 대학에 가장 들어가기 힘든 학부가 정치경제학부여서 지원했고 운이 좋게 합격했다. 경제학과에 가면 좋은 곳에 취업해 부모님이 뿌듯해할 만한 일자리와 연봉을 선사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제학 수업은 지루했고 정말 흥미가 없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은 왠지 불안했기에 대다수가 하는 정도의 공부를 했고 대다수가 취업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에 같이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수많은 전학과 환경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나의 적응능력을 발휘해 면접에서도 내가 ‘채용해야 하는 인재’로 면접관을 곧잘 속였다. 우리 학과를 나오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이 투자은행과 경영컨설팅회사이기에 그 두 곳을 집중 공략했고 한 경영컨설팅회사에 합격했다. 사실 크게 경영, 조직운영, 인수합병 같은 복잡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합격과 함께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말씀드리자 본인들의 20여 년간의 양육의 결과로 만족해하셨고 크나큰 기쁨과 안도하는 마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었지만 나는 마음이 그림자 졌다.


    초등학교 뒤에는 중학교가, 중학교 뒤엔 고등학교, 고등학교 뒤에는 대학교가 있었다. 이제 회사에 들어가면 평생 회사를 다녀야   같은데(아니면 결혼 전까지라도..라고 생각했다.) 막막했다. 대학원이 필수과정이었으면 싶었다. 그럼 대학원으로 도피해버리고 싶었다. 분명히 나는 모범생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모범생으로 살면 그냥 행복은  미래에 당연히 있다고 믿었는데  행복은  씻고 찾아봐도 없다. 엄마가 나에게 어렸을 때부터 “10 고생하면 50년이 편하다.”라고 말하며 공부하라 해서 열심히 10 고생했더니 50  고생하게 생겼다. 가짜 모범생으로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사회에 일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사람인 것처럼 살고 있지만  속은 곪아있었다. 겉만 요란하고 안은 텅텅 비어 공허한 울림만 있은 투박한 깡통 같았다. 이러면서 뭔가 대단히 모범되는 사람인 것처럼 때로는 우월감도 느끼고 맘대로 남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하찮은 인간이었다니! 부끄러웠다.


    나는 아들을 키우면서 모범생이 되어라 가르치지 않으리 다짐한다.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싶은 마음보다는 본인이 본인의 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타인을 과도하게 바라보면 나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헷갈린다.  뒤엉켜있는 욕망의 실타래를 풀고 마음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나의 말에 토를 달고  권위에 저항도 하고 반항도 하는 건강한 사춘기를 보내길 바란다. (사춘기가 될 아들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부모님과 분리된 진정한 ‘  찾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야 찾고 있으니  값진 여정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의 10년이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한 10년이 다가올 70년의 행복의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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