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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고 Jan 17. 2022

영어라는 무기

상처 혹은 자부심

유럽에 엄마와 둘이 2주간 여행을  적이 있다. 엄마가 앞장서서 레스토랑의 웨이터, 가게의 점원, 호텔의 스태프들과 이야기할 때는 엄마의 버벅되는 영어를 견뎌주고 있는 표정을 짓거나 짧은 인내심이  끝에 묻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서서 영어로 이야기하면 사뭇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나의 영어는 더더욱 빛났다. 유난히 영어 발음이 어려운 일본인들에게 영어시간에 내 발음을 들으면 엄청난 부러움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스고이…갓꼬이이..) 내가 일본에서 회사에 취업한 뒤, 첫 연수 날에 동기들과 함께 토익시험을 치렀는데 나의 토익점수를 본 동기들은 나를 ‘카미’(신)라고 불렀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 자체로 나를 마치 발광체로 보는 듯한 신선한 느낌을 일본에서는 자주 느끼곤 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마냥 솜사탕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 우리나라처럼 영어교육이 한글교육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나라에서는 때로는 소화가 되지 않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한 어린 소녀가 되어있었다. 그때만 해도 조기유학생이 흔하지 않았을 때라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이 우리 반, 그리고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이 금세 퍼져나갔다. 영어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나에게 지문을 읽으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학부모들은 나와 놀게끔 하고 싶어 했다. 나와 시간을 보내는 자식에게 은근슬쩍 강요과 협박을 하며 영어로 나에게 말하라고 눈치를 주는 경우, 나에게 영어로 문자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에게 동네 친한 친구가 한 분 계셨는데 그분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 친구분은 엄마에게 내가 아침마다 15분씩 전화영어 강사 인척 전화를 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하셨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딸을 둔 것만으로도 부러움의 눈초리를 가득 받고 있는 엄마를 뿌듯하게 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 원어민 강사 인척 15분 동안 그 아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의 뿌듯한 표정과 밝은 눈빛을 보는 게 좋았다.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 곧 미국으로 교환유학을 떠나는 한국인 선배가 커피를 한잔 마시자고 나를 불렀다. 나는 작별인사라도 하려나 싶어 나갔을 때, 테이블에 앉자마자 공책을 펼치며 2시간 동안 온갖 영어 표현과 자주 쓰는 단어를 물어보고 연필로 한 줄 한 줄 적어 나갔다. 뭔가 습격당한 느낌이었다. 영어 습격. 2시간 동안 나는 얼떨결에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고 그 선배는 커피 한잔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당혹감과 실망감이 내 발걸음을 더욱더 무겁게 했다.


아이를 낳고 동네 아파트 사람들과 많이 친해졌다. 아직 어린이집에 보내기에는 너무 어려 가정 보육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같이 공동육아를 하는 것이 위안이 많이 되기도 했다. 육아에 대한 고충, 남편에 대한 불만, 또 앞으로의 교육관 등을 이야기 나누며 내 불안을 중화시키기도 걱정을 가중시키기도 하는 날들이었다. 어느 날, 같은 단지네 언니 집에 여러 명이 아이를 데리고 모였다. 매트 위에서 아이들이 함께 노는 것을 지켜보며 수다를 떨다가 그 언니가 영어책을 꺼냈다.


“영어 책 좀 읽어줘. 너 발음으로 좀 배우게.”


그러면서 아이를 내 앞에 앉힌다. 거절하기 어려운 나는 앉은자리에서 책을 여러 권 읽었고 언니는 그 아이에게 집중하라고 온갖 애를 썼다.


스키를  때도 엣지 왁싱을 정성스럽게  스키는 미끄러지듯 리듬이 타지며 내려오는 것처럼 영어 하나로  삶이 엣지 왁싱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떠한 ‘우월성’, ‘상품성 지닌다. 커리어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은 과도하게 위축되어 있고 과도하게 자기 폄하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영어라는 (tool) 사용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낙오자가  것처럼 느끼고 아이에게만은  툴을 정교하게 갈고닦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영어’가 누군가에게의 여린 마음에 큰 상처이기도 하고 자격지심이기도 하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큰 자부심이기도 가장 화려한 장신구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가끔 ‘나’라는 사람은 ‘영어’라고 하는 큰 장신구 뒤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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