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 가볍게 옷을 입고 집 앞 한강에 산책하러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한강으로 가는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마음속으로 고른다. 왼쪽은 저 멀리 서울 N타워가 남산 위로 보여 서울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강의 모양대로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타워가 숨었다가 다시 보였다가를 반복한다. 제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다리를 지나 산책하다 한강을 건너는 전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미도 있다. 지금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괜한 상상을 하는 것도 내 취미다.
오른쪽으로 갈 때면 가까운 자연을 더 느낄 수 있다. 초봄에는 매화꽃이 가득하고 봄이 무르익으면 라일락 꽃들이 심어져 있어 향긋한 향기가 그윽하다. 마스크를 살짝 내려 향기를 맡을 때면 정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 조팝나무와 이팝나무는 한여름의 눈 같다. 하루하루 다르게 팝콘처럼 하얀 꽃망울을 터트린다. 아이는 치즈가 뿌려져 있는 브로콜리 같다며 낄낄 웃었다.
여름의 한강은 우리 가족의 놀이터다. 주중에 혼자 시간을 보낼 때는 재작년에 산 캠핑의자, 제주도 함덕해수욕장에서 산 수제 소라 스피커를 들고 한강으로 나간다. 나무 아래 반쯤 그늘, 반쯤은 햇볕인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 책을 읽는다. 앉아있으면서 햇볕의 방향에 따라 조금씩 의자를 움직여주는 일은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해 준다. 주말이 되면 세 가족 함께 한강으로 나간다. 남편의 양 어깨에는 캠핑의자가 들려있고 내 소풍가방에는 칠링 된 와인과 시원한 수박이 있다. 세 가족이서 보내는 여유로운 한여름의 주말은 우리가 이 동네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가을이면 억새가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겸손하게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억새와 잔잔한 물결치는 한강은 경이로운 조합이다. 가을은 우리 부부가 자전거를 타기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한참 가다 보면 코스모스, 금계국, 들꽃이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는 다시 한번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상기시켜준다.
겨울의 한강은 좀 차갑고 거친 상대다. 살갗이 패이는 듯한 칼바람은 오래간만에 자연 앞에 인간이 겸손해질 기회가 된다. 손 시린 영하 날씨의 바람과 눈은 사람들을 각자의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해 자연이 주인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린 다음날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친 상대를 만나러 간다. 겨울 한강은 특히 한적해서 여유롭다. 산책하는 사람이 적어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찍힌 발자국이 몇 개 없다. 나가서 내가 어린아이처럼 발자국을 마구 찍으며 뛰어다닌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강물도 구경거리다. 작은 돌을 몇 개 찾아 얼음 위로 던져 얼마나 두터운 얼음인지 확인해보며 논다.
한강의 노을은 너무나 아름답다. 매일 보는 한강의 노을에 조금은 오버스러운 감탄을 할 때면 남편은 봐도 봐도 그렇게 좋냐며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본다. 한강은 사시사철 나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