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우리 가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매우 ‘자극 추구’ 형 가족이다. 삶은 모험이며 도전하자! 이런 열정적인 기류가 항상 지배했다. (20세기에 YOLO의 선구자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흥적이기도 하며 유연하기도 하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엄마가 90년대에 애 둘만 데리고 캐나다를 간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무서워서 엄두도 안 날 일이다. 그것도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맡친지 2년도 되지 않을 때 떠났다.
주말은 서프라이즈로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를 차 가득 실고 즉흥적으로 동해로 떠나기도 했으며 좋은 집을 발견하면 금방 이사도 많이 다녔다. 함박눈이 내린 날이면 내가 가벼운 감기가 있어도 옷을 꽁꽁 싸매고 나가서 눈싸움을 했다. 엄마는 말했다.
“그거 어차피 낫는 거 오늘 같은 날 버릴 수 없잖아! 눈도 이렇게 많이 왔는데!”
힘겨워도 막상 나가서 놀면 감기를 잊을 만큼 즐거운 추억이 되곤 했다. (그 후에 감기가 심해져서 일주일 동안 고생한 건 기억삭제.)
부모님에게 대출이란 위험보다 도전이었으며 병은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자극 추구형 가족 속에서 자라다 보니 경험한 것도 다양하고 참 이색적인 삶의 루트를 살아왔다. (진부한 것은 다 거부한다!!) 좋은 점도 많지만 음식점에 가도 먹어본 음식만 주문하는 그런 성격의 나는 이런 모험들이 위협과 불안을 머금게 하였고, 심사숙고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매번 달라지는 선택과 환경이 내 머릿속에 깊고 깊은 카오스를 만들어냈다.
사실 모르겠다. 부모님의 이런 모험 가득한 도전들이 나를 불안이 많은 안전추구형 인간으로 만든 것인지, 내가 원래 타고난 기질이 이래서 이러한 모험들이 즐겁기보단 꾸역꾸역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용감무쌍한 가족 속에서 혼자 지질하게 겁쟁이인 것만 같아서 스스로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나보고 초를 친다며 뭐라 한다. 새로운 도전거리로 다들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데 혼자 위험요소나 나쁜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것이 흥분과 희망의 불씨에 찬 물을 끼얹는 모습이었다. 나도 내 마음속 작은 불안의 목소리들을 뮤트 시키고 김칫국 한 사발 드링킹 하면 좋을 것을.
언니라도 나처럼 겁쟁이면 좋으려 만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은 에너자이저, 무한체력 언니 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난 가족 안에서도 이방인이다. (으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