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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Mar 25. 2024

이 봄엔

가슴이 시리다

이 봄엔


어느덧 구월이 가고 시월이 왔다. 남반구의 계절은 북반구와 반대이니 남반구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의 시월은 봄이어야 했다. 그러나 봄은 보이지 않고 잔인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보인다. 코로나는 여전히 세상 모든 곳에서 꿈틀거리고 청정국이라는 여기 뉴질랜드도 예외는 아니기에 록다운(lockdown) 아래서 지낼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살다 보니 어느 사이 고희(古稀)를 훌쩍 넘겼고 해마다 봄을 맞았지만 올봄처럼 봄답지 않은 봄은 없었다. 기후 변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봄마저 변이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날은 춥고 하루 건너 비가 쏟아졌고 바람은 미친 듯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그러다 보니 올해 봄에는 내가 봄을 타게 되었나 보다. 봄을 탄다는 말이 사춘기 소녀나 혼자 사는 여인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올봄엔 영락없이 내가 봄을 타고 있었다.


봄을 타면 마음이 약해지나 보다. 평소의 내가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올봄엔 봄이 봄답지 않아서 그런지 무척 마음이 약해진 내 모습에 내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책을 읽다가도 별것도 아닌 구절에 꽂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는가 하면 음악을 듣다가도 어느 한 구절에 부딪혀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그런 내가 두려워 어느 날엔 일부러 온종일 책과 음악을 멀리한 적도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아침저녁으로 정원을 둘러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올해는 봄답지 않은 봄이라 춥고 바람 부는 날씨가 많았지만 그 틈바구니를 뚫고 자라나는 꽃과 나무의 생명력은 경이로웠다. 어느 날 아침 정원 한구석에 있는 몇 그루  장미가 꽃봉오리를 내밀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너무 반가워서 빨리 활짝 피었으면 했다. 마음속 심안(心眼)에는 벌써 흰색 붉은색의 활짝 핀 장미 송이가 그득했다. 


그날 오후 아내와 같이 동네 골목길을 산책하다가 어느 집 정원에 있는 동백나무를 보았다. 활짝 핀 꽃이 나무를 휩싸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히려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꽃이었다. 떨어져 있는 꽃이 달려있는 꽃보다 훨씬 많았고 그중에 상당수는 채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가여운 봉오리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정원의 장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 하기가 두려웠다. 피어나는 꽃봉오리보다 땅에 떨어져 흩어진 장미 꽃잎이 먼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이 봄엔 내가 봄을 타나 보다. 그리고 나이도 들었나 보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시리고 이런 시(詩)도 쓰게 되나 보다.


이 봄엔


이 봄엔

그냥 가슴이 시리다


봄이 와도 

떠나는 봄의 모습이 먼저 보여 가슴이 시리다

봄 뜨락에 꽃이 피기 시작해도 

지는 꽃의 모습이 먼저 보여 가슴이 시리다 


이 봄엔

바람이 불면 

묻어오는 추억을 받아내기에 가슴이 시리고

하늘이 푸르면 

세월의 멍인 양 온몸에 내려 쌓이는 푸르름에 가슴이 시리다


이 봄엔 

햇살이 너무 밝으면 

그 투명(透明) 안에 내 모습이 드러나 가슴이 시리고

비가 내리면 

빗속으로 사라지는 옛사람들의 환영(幻影)에 가슴이 시리다


이 봄엔

오는 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떠나는 봄의 모습만 보여

내내 가슴이 시리다.


2021. 10. 1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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