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줄 모르고 살고 있었네
하이킹 중 사고
아내가 팔을 다친 지 벌써 2주일이 넘었다.
사고가 났던 그날따라 날씨가 무척 좋았다. 집에서 이것저것 할 일이 있다는 아내에게 이렇게 좋은 날에는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는 게 좋다고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가 그만 작은 사고를 당해 아내의 왼 손목이 부러졌다. 아직도 그날 사고가 나던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를 스치면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 찰나의 모습을 떨구어 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깨고 싶어도 깨어나지지 않는 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헨더슨(Henderson: 뉴질랜드 오클랜드 서쪽 마을)에 사시는 선배님 내외와 같이 그 댁에서 가까운 Fairy Falls에 올라갔다. 길은 아름다웠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내려 쪼이는 봄 햇살은 따사했다. 분홍색 점퍼에 갈색 모자 그리고 검은 색 선글라스를 낀 아내의 모습은 그날따라 나이를 잊은 듯 아름다웠고 걷는 발걸음은 소녀만큼 가벼웠다. 그런 아내를 보며 선배님 내외도 ‘요정의 폭포(Fairy Falls)’에 모처럼 정말 요정이 찾아 들었다고 농담을 하시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길을 내려왔다. 몇 일 전 비가 왔기에 제법 물이 불은 냇물을 건너야 하는데 내가 앞장 서서 건넜고 아내가 뒤를 따랐다. 먼저 건넌 내가 “여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건너요,”하고 돌아서는 순간 아내가 팔랑 나비가 내려 앉듯 냇가의 바위 위로 엎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떻게 발을 헛디뎠는지 혹은 미끄러졌는지 보통은 뒤로 넘어지는데 아내는 앞으로 넘어졌고 벌받는 여학생처럼 두 손을 위로 올린 채 바닥에 그냥 엎어져 있었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엎어져 있는 아내의 모습은 분홍색 인형이었다. 나는 무성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고 아내는 그 영화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영사기는 멈췄고 시간도 멈췄다.
“아니, 저걸 어떻게 해. 넘어졌잖아요!” 뒤따라 오시던 선배님 부인이 놀라서 소리를 쳤을 때 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내에게 달려갔다. 넘어지는 충격으로 잠깐 정신을 잃었던지 미동도 않고 엎어져있던 아내가 달려가 안아서 일으키자 비로소 부스스 눈을 떴다. “여보 괜찮아?” 눈을 떠준 것만도 고마워서 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미끄러운 바위 위로 앞으로 넘어졌지만 아내는 불행 중 다행으로 얼굴과 머리는 다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넘어지는 순간 왼 손으로 땅을 짚었는지 왼 손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손을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다. 급한 대로 나뭇가지를 주워 부목을 대신하여 왼 팔을 고정시키고 손수건을 연결하여 왼팔을 목에 걸고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나왔다. 올 때는 그렇게 아름답고 평안했던 산길이 왜 그렇게 힘들고 멀기만 한지 차를 세워놓은 곳까지 나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내에게는 손목이 그냥 겹질려 삔 것이지 부러진 것은 아닐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제발 큰 부상이 아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아내를 부축하고 걸었다.
응급실로 뛰어들다
와이타케레(Waitakere; 오클랜드 서쪽 지역 이름) 국립병원 응급실로 뛰어들었다. 이십 년 넘게 이 나라에 살면서 국립병원에 가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대개는 다른 분들 병문안 하려고 갔었지 이번처럼 사고를 당해서 환자의 입장으로 간 것은 처음이었다. 뉴질랜드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선진국이 무엇인지 알려면 병원에 가보면 안다고 몇몇 분들이 이야기했지만 그 때는 그냥 귓등으로 들어 넘겼다. 그러나 이번에 아내를 치료해 주는 병원의 간호사들의 친절한 자세를 보면서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실감했다. 간단한 환자등록 절차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간호원이 나와서 아내를 데리고 들어가 X Ray를 찍었고 X Ray 결과가 나오자 곧 석고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 입구에 붙어있는 석고실(Plaster Room)이란 표지판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석고실로 가느냐고 내가 묻자 안내하던 간호사가 왼 손목 뼈가 부러져서 깁스를 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뼈가 부러지다니, 아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참담함이란!
석고실에 들어가자 간호사들이 아내를 침대에 눕도록 했다. 두 명의 간호사가 아내를 돌보았고 부러진 뼈를 제대로 맞추기 위하여 왼 손목 부위를 강제로 잡아당겨야 한다고 했다. 상당한 아픔이 있을 것이기에 우선 진통제를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간호사 하나가 아내의 오른 팔에 커다란 주사바늘을 꽂았다. 바늘이 아내의 연약한 혈관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아내는 잘 견뎠다. 그러나 얼굴색은 너무도 창백했다. ‘내 잘못이야. 무엇 때문에 집에 있겠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나와서 사고를 당하게 만드나.’ 나는 후회막급이었다. 여린 보석 같은 아내를 잘 보호는 하지 못할 망정 맘대로 데리고 다니다가 온전한 보석에 흠집을 낸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의 팔에 주사를 놓던 간호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 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그러다가 남편 분이 쓰러지겠어요.”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간호사가 나를 의자에 앉혔다. 주사를 놓던 간호사가 아내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자 말했다. “Oh, darling, I’m so sorry. It won’t be long. Oh, poor darling! ’ 그렇게 말하는 간호사의 얼굴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자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간호사는 환자와 아픔을 같이 나누고 있었다. 간호사들의 사랑이 담긴 마음씨와 손길에 아내도 나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그녀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곧 이어 아내의 팔에 석고 작업을 하면서도 그녀들의 최우선 순위는 환자가 편하도록 아프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팔 한 번 만지면서 붕대 한 번 감으면서 괜찮으냐고 묻고 또 물으면서 아내가 조금이라도 아픈 표정을 지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석고작업을 끝냈다. 백의의 천사라더니 이런 분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감탄 할 수 밖에 없었다. 치료가 다 끝난 뒤 그들은 우리 내외를 출입구까지 안내해주었다. 그 다음 날 우리가 가야 할 Shore Care(우리가 살고 있는 곳 근처의 병원 이름)의 위치가 나와있는 지도까지 복사해서 갖다 주면서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 부부가 이 땅에서 산지 오래되었지만 그들 눈에 비친 우리들은 분명 이방인이었고 동양의 작은 노인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립병원이라 치료비도 받지 않으면서 우리를 이렇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그들의 따뜻한 태도에 비록 사고를 당한 처지지만 마치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다 돌아가는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많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지만 진통제 덕분인지 아내는 의외로 잘 자고 일어났다. 같이 동행했었던 선배님 내외분을 통해서 알았는지 아침부터 계속해서 문안 및 위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또 격려해주시는 모든 분들의 목소리에는 사랑이 담겨있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 병원에 갈 준비를 하는데 어제 동행했었던 선배님 내외분이 찾아오셨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양 손 가득히 김치, 나물, 여러 가지 밑반찬 등등을 들고 오셨다. 손이 아픈 사람이 음식 하기 힘들 것을 배려해서 가져오신 것이었다. 어제 산에 같이 갔었다 사고를 당한 우리 때문에 이것저것 시간도 많이 뺏기고 애도 많이 쓰셨는데 이렇게 음식까지 준비해 오신 그 따뜻한 마음씨에 그만 가슴이 뜨거워왔다.
오후에 Shore Care에 가서 다시 X Ray를 찍어보고 의사를 만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롭다는 말을 듣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집 문 앞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다녀가면서 또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잔뜩 문 앞에 놓고 갔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놓고 갔는지, 그 따뜻한 마음씨가 아직도 따뜻한 음식 그릇을 통해 전해져 왔다. 아내와 나는 말도 못하고 그냥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아내의 고마움을 느끼다
그리고 몇 일이 지나갔다. 한 손을 못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를 이번에 알게 되었다. 한 손으로는 치약 뚜껑 하나 제대로 열 수가 없었고 깁스를 한 손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니 목욕도 혼자 할 수 없었고 옷도 혼자 입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왼 팔 노릇을 해야만 했고 왼 팔이 도와주지 않는 오른 팔이란 많은 경우 혼자서는 그나마 한 팔의 역할도 제대로 못 하기에 결국 나는 아내의 두 팔 노릇을 해야만 했다. 아내는 온전히 내게 온몸을 맡겼고 나는 아내가 하던 집안 일들은 물론 아내의 몸단장까지 도와주어야만 했다.
아내가 손을 다치긴 했지만 이번 기회에 나는 여러 가지를 배웠다. 결혼 한 뒤 이제껏 거의 40년간을 나는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옷을 입을 땐 옷장에 걸려있는 옷을 꺼내 입었다. 밥이 어떻게 식탁 위에 놓이는지 옷이 어떻게 옷장 속에 들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전기 밥솥을 사용하는 법도 세탁기에 옷을 넣고 빨래를 돌리는 방법도 배웠다. 계란 프라이를 하기 위해서 달걀을 깨는 것도 배웠고 과일껍질을 벗기는 것도 배웠다. 힘이 들기도 했지만 아내가 시키는 대로 내 손을 써서 준비한 음식을 아내와 같이 먹는 것이 신기도 했고 재미도 났다. 그리고 밥하고 빨래하는 집안일이 이렇게 많은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고 그 많은 일을 묵묵히 해 온 아내에게 너무도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의사의 말이 아내가 손이 낫기까지 6주 약 40일이 걸린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아내에게 쉴 시간을 주시면서 아내의 40년 수고를 내게는 40일 봉사로 대신하게 하시며 아내의 고마움을 깨닫게 해주시니 너무도 관대한 처분이 아닌가 싶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엔 아내의 손이 나을 때까지 어떻게 견디나 하고 걱정도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아내와 더 가까워지는 시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기대신 집안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아내는 내 곁에 더욱 바짝 다가와 있고 이제껏 나를 위해서 너무 수고한 아내가 너무 고마워 나는 오히려 아내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간다. 혼자서는 옷도 제대로 입지도 벗지도 못하는 아내에게 옷 수발도 들고 목욕도 시켜주면서 오히려 신혼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환갑을 지난 지 벌써 오래지만 아내는 아직도 내 앞에서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만 그러는 아내가 내 눈엔 신혼시절 못지않게 아름답기만 하다. 아내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천사였는데 그 천사와 40년 같이 살면서도 그걸 모르고 살다가 아내의 손이 부러진 뒤에야 깨달았으니 나는 얼마나 미욱한 사람인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갖는 화요음악회도 아내의 도움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이 느껴지는데 이제 곧 100회를 맞게 된다. 하지만 아내의 손이 아픈데 음악회를 계속 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당분간 화요음악회는 쉬어야 하겠다,”라고 말하자 아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여보, 화요일을 기다리는 분들을 생각해야지요. 당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내가 한 손으로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어요. 걱정 말고 그대로 계속하세요,”라고 용기를 주었기에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
사람이 아무런 어려운 일없이 너무 안온하게 살다 보면 심신이 아울러 나태해지기 쉽고 감사하는 마음도 무뎌지기 쉽고 주변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도 어두워지기 쉽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깨달았다. 이번에 아내의 작은 사고를 통하여 나와 아내는 우리 주변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좋으신 분들인지 우리가 그분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지를 가슴 속 깊이 실감하였다.
사고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고 힘을 실어 주시는 분들, 그 동안 소식이 뜸했던 분들 중에서도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서 멀리서부터 전화를 주시는 분들, 그리고 아내의 손이 불편해 음식 준비 못할 것을 염려해서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갖다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들을 갖다 주시는 분들, 뼈에 좋다는 국을 끓여다 주시는 분들, 맛있는 요리를 해서 식기 전에 먹으라고 급히 달려와 놓고 가시는 분들, 집에서 해먹기 어려울 거라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귀한 식사 대접을 해주시는 분들, 집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거라고 차를 갖고 오셔서 우리 내외를 태우고 멀리 공원으로 나가 산보도 시켜주고 또 맛있는 것도 사주시는 분들, 외출했다 들어와 보면 우리가 없는 사이 어느새 와서 집 대문 앞에 꽃과 과일을 놓고 가시는 분들, 아 이 고마운 모든 분들을 어떻게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아껴주시는 귀한 분들을 그 동안 제대로 알아 보지도 못하고 지내온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느 날 아침엔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려는데 카톡이 울렸다. 이런 이른 아침에 웬일인가 하고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다. ‘선생님 비가 오시네요. 날이 궂으면 손목이 더 아프시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여기까지 읽으면서 그만 울컥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게 여겨지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라고 했는데 이 카톡을 보내신 분은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를 가졌기에 비 오는 날씨를 보고 무엇보다 먼저 아내의 아픈 손목을 염려했을까를 생각하니 그냥 가슴이 뜨거워왔다. "여보, 무슨 카톡이에요?"라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대답대신 스마트 폰을 갖다 주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고마운 분들에게----"하면서 아내가 말을 맺지 못했다. “글쎄 말이오. 우리가 천사들 틈에서 살고 있나 봐요. 이제껏 그걸 모르고 살고 있었으니---"하면서 나도 말을 맺지 못하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가 성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우린 서로 잡은 두 손을 꼭 쥐므로 맺지 못한 말을 대신했다.
그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렇지만 아내의 다친 손목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내리는 비를 가슴 속으로 받아내며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시(詩) 한 편을 만들었다.
천사들 틈에서 살고 있었네
천사들 틈에서 살고 있었네
그런줄 모르고 살아 왔었네
아프고 나서야 눈이 뜨였네
그들이 천산줄 이제 알았네
천사들 틈에서 살고 있었네
가까운 사람들 모두 천산데
머나먼 하늘만 바라 보면서
천사가 없다고 불평 했었네
천사들 틈에서 살고 있었네
끝까지 모르고 살뻔 했었네
참사랑 받고서 알게 됐으니
이제는 사랑을 주며 살겠네
2014. 11.2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