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코리(Richard Cory)와 귀천
리처드 코리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미국 시인, 1869~1935)
리처드 코리가 시내로 나올 때마다,
우리는 길에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사였고,
깨끗한 용모에, 그리고 기품 있게 날씬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수수하게 차려입었고,
그리고 그가 말할 때는 늘 인간미가 넘쳤다;
그러면서도 그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할 때,
그는 맥박이 뛰게 했고 그리고 걸을 때 그는 빛이 났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다 –정말, 왕보다도 더 부자였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교육을 받았다:
결국, 그는 우리가 그였으면 하고 바라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계속했고, 볕 들 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그리고 고기 없이 견디었고, 그리고 투덜거리며 빵을 먹었다;
그리고 리처드 코리는, 어느 조용한 여름날 밤,
집으로 돌아가 자기 머리에 총알을 관통시켰다.
Richard Cory
Edwin Arlington Robinson
Whenever Richard Cory went down town,
We people on the pavement looked at him:
He was a gentleman from sole to crown,
Clean favored, and imperially slim.
And he was always quietly arrayed,
And he was always human when he talked;
But still he fluttered pulses when he said,
"Good morning", and he glittered when he walked.
And he was rich - yes, richer than a king -
And admirably schooled in every grace:
In fine, we thought that he was everything
To make us wish that we were in his place.
So on we worked, and waited for the light,
And went without the meat, and cursed the bread;
And Richard Cory, one calm summer night,
Went home and put a bullet through his head.
대학교 2학년 때 만난 리처드 코리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60년대 말 우리 모두가 가난하였던 그 시절에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리처드 코리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대해 조금 분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교정 밖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고 라디오에선 ‘잘 살아 보세’의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흘러나오던 그 시절에 리처드 코리는 이 시 속의 ‘우리(마을 사람들)’ 뿐이 아니라 60년대 말의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우리가 그였으면 하고 바라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대로라면 우리의 이상형이었던 그는 행복하게 살다가 우아하게 생애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모두의 기대에 반하여 우리의 이상형이자 동화 속의 주인공 같은 리처드 코리의 삶을 자살로, 그것도 피가 튀고 머리가 부서지는 참혹한 자살로 끝내 버렸습니다. 너무도 황당한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젊은 날의 나는 시인의 마음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을뿐더러 주인공 리처드 코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그대로 접어두었습니다.
이 시를 다시 읽게 된 때는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80년대 말이었습니다. 88 올림픽이 끝난 어느 한적한 오후 책장을 살피다가 ‘The Golden Treasury’라는 영시집(英詩集)에 눈이 멈췄습니다. 20년이 넘게 내 서재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 시집을 보며 문득 대학시절 그 시집을 들고 다녔던 기억이 새로워 꺼내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여기저기 책장을 넘기며 오래된 책 특유의 내음을 즐기다 만난 시가 ‘리처드 코리’였습니다. ‘아하, 이 시였구나,’라고 나는 속으로 그 옛날 20년 전 이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다시 이 시를 읽었습니다.
20년 뒤에 다시 만난 리처드 코리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이 시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극단적 처신이 이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에 놀랬습니다. 왜일까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 시를 천천히 읽었습니다. 리처드 코리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평이하게 서술한 첫째 연의 마지막 절 둘째 마디부터 접속사 ‘그리고(and)’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시를 쓸 때 가능한 접속사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뜻이 함축된 단어의 사용으로 시를 간결하게 하고 시의 해석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싶어 하는 시인에게 접속사는 많은 경우 역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 로빈슨은 이 시에서 접속사 그리고(and)를 첫째 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연의 끝부터 둘째 연과 셋째 연에 나오는 그리고(and)는 계속해서 리처드 코리의 훌륭한 인격과 사람됨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셋째 연에서 리처드 코리는 ‘모든 것’이 됩니다. 마지막 연의 첫 절과 둘째 절의 그리고(and)는 돌연 방향을 바꿔 마을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알립니다. 왜 갑자기 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 나타난 그리고(and)는 숨 막힐 듯 조용히 반전하여 리처드 코리의 자살을 알립니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시는 끝납니다.
감수성 예민한 독자 중에서는 이 시를 읽은 뒤 머릿속 어딘가에서 나는 조용한 발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걸어오는 발소리는 이 시에서 반복되는 ‘그리고(and)’와 같습니다. 누구일까 이 발소리는 하며 독자는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and)’는 반복됩니다. 마지막 그리고(and)에서 리처드 코리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그전까지의 ‘그리고(and)’에서 묘사된 리처드 코리는 그의 참모습이 아니고 마을사람들의 부러움과 바람이 빚어낸 겉모습이었습니다. 드디어 발소리(and)가 그쳤을 때 리처드 코리는 죽음으로 삶을 끝내고 그의 참모습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집니다. 리처드 코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시를 끝내는 시인은 이제껏 시에서 금기시되는 접속사 ‘그리고(and)’로 설명할 만큼 설명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죽은 뒤에야 이해가 된 리처드 코리의 마음
이 짧은 시가 그렇게도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 리처드 코리 때문이 아니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과 바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길과 바람은 바로 우리들의 눈길과 바람과 너무도 같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20년 뒤 다시 읽었을 때 어느 정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대학교 2학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철없던 시절엔 리처드 코리의 속마음도 마을 사람들의 눈길과 바람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살아가면서 마을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의 바람과 같은 바람을 가슴에 안고 살다 보니 이 시가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런 바람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그들의 ‘모든 것’이 조용한 여름날 밤에 와르르 부서져내리는 것을 보며 세속적 바람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가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삶이 허망하게 느껴질 때 생각나는 시(詩)
나이가 들면 모든 욕심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삶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지기도 합니다. 젊은 날 피 끓는 육신이 부추기는 물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가슴속에서 꿈틀댈 때는 리처드 코리를 들춰보며 마음을 달래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고 육신이 시들해지며 욕망도 같이 시들해졌지만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느끼는 지나간 삶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은 더욱 커져갑니다. 그럴 때 생각이 나서 꺼내 보는 시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입니다.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먼저 읽었던 시의 리처드 코리는 왕보다 더 부자였고 깨끗한 용모에 기품 있는 날씬한 몸매의 신사였지만 시(詩) 귀천의 주인공 ‘나’인 천상병 시인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았고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입원되기도 했습니다. 힘들고 불우한 그의 삶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가 쓴 시는 거의가 순수한 마음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시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귀천은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에 쓴 시라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967년 소위 동백림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말할 수 없이 몹쓸 고문을 당하여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으로 비유한 것은 이해가 가도 평생을 가난 속에서 허덕이고 살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간첩으로 몰려 온갖 고초를 다 당했던 스스로의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라고 말한 그의 고백을 들으면 그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힘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누구에게 말한다는 말일까요?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시의 매 연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으니 그가 가서 말할 분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이었을 것입니다. 비참할 정도로 힘든 삶을 마치고 돌아간 그가 창조주 앞에 가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을(Why me)?’이라는 불평 대신에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고백하니 그 아름다운 시인의 성정에 그만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질 걸 다 가졌던 리처드 코리는 삶의 허망함에 못 이겨 스스로의 삶을 끝낼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살았던 천상병 시인은 주어진 삶을 살다가 삶이 끝날 때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합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편의 시이지만 둘 다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시입니다.
2024. 9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