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가을의 노래
뽀올 베를렌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수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리면
몹시 숨이 막히고
창백해져서
나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물 흘리네.
그리하여 나는 떠나네
거센 바람이
날 쓸어가는 대로
이리, 저리,
마치
죽은 나뭇잎처럼.
Chanson d'automne
Paul Verlaine (1844~1896)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
Blessent mon cœur
D’une langueur
Monotone.
Tout suffocant
Et blême, quand
Sonne l’heure,
Je me souviens
Des jours anciens
Et je pleure
Et je m’en vais
Au vent mauvais
Qui m’emporte
Deçà, delà,
Pareil à la
Feuille morte
가을이면 생각나는 ‘가을의 노래’
릴케의 시 ‘가을날’만큼이나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프랑스 시인 뽀올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입니다. 얼핏 생각에는 불과 세 연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이에 사춘기 여학생 취향의 감상적인 시가 왜 그렇게 유명할까 의아한 느낌을 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이 시가 프랑스 사람 그리고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이 시를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을 때 주는 음악성에 있습니다. 베를렌은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가를 시로 표현한 그의 시 ‘시법(詩法, Art poétique)’에서 첫 구절을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을’이라고 시작합니다. 시에서 음악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베를렌이 감성이 풍부했던 젊은 나이에 쓴 이 시에서도 프랑스어 특유의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그 음악성을 모두 느낄 수는 없지만 여기 있는 원문을 보면서 조금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짧은 연(聯)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각 연은 여섯 줄로 되어 있습니다. 문장의 끝을 맺는 단어들로 운율을 맞추는 것을 각운(脚韻)이라고 하는데 이 시의 세 연의 여섯 줄의 끝 단어들을 보면 모두 aabccb의 형식으로 각운을 맞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줄과 둘째 줄, 셋째 줄과 여섯째 줄, 넷째 줄과 다섯째 줄의 끝(脚)이 같은 발음입니다.
또한 첫 연에 나오는 시어(詩語)를 잘 살펴보면 유난히 알파벳 ‘o’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첫 연에 들어있는 무려 10개의 ‘o’가 조화를 이루며 내는 소리의 효과를 마음의 귀로 들으며 번역된 시를 읽으면 한결 더 시인의 마음이 가슴에 와닿을 것입니다. 특히 이 연의 마지막 단어 Monotone에는 3개의 ‘o’가 들어있는데 ‘모노똔느’라고 읽으면 이 시가 갖고 있는 특유의 음조가 들리는 느낌입니다. 베를렌은 흔히 프랑스의 3대 상징주의 시인 중 하나라고 일컬어집니다. 시의 형식이 언어의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상징주의 시의 중요한 특징을 베를렌은 이 짧은 시를 통해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 연에서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이라 번역된 구절은 정확히 번역하면 ‘바이올린들의 긴 흐느낌’이라고 해야 합니다. 원문에 사용된 바이올린이 복수의 바이올린(violons)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야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그가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들었던 추억 속의 ‘바이올린들’의 소리이던지, 아니면 가을바람이 사위의 나뭇가지들을 스치며 내는 소리를 여러 ‘바이올린들’이 내는 흐느낌으로 느꼈기에 ‘바이올린들(violons)’이라고 복수로 썼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수나 복수가 아니고 그 소리가 시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베를렌은 사촌 누나 엘리자를 흠모하고 사랑했지만 엘리자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때 받은 상처와 슬픔이 베를렌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남아있었습니다.
두 번째 연에서 종소리 울리면 숨이 막히고 창백해진다고 했습니다. ‘종소리 울리면 (sonne l’heure)’이라는 표현은 베를렌도 다른 프랑스 시인들도 즐겨 쓰는 구절입니다. ‘heure’라는 프랑스 단어에는 종(鍾)이라는 뜻도 시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분은 이 구절을 ‘시계의 종이 울리면’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heure’가 시계탑의 종일 수도 교회의 종일 수도 있지만 ‘sonne l’heure’라는 구절은 프랑스의 시인들이 시간, 삶, 사랑 등이 변화하는 순간을 상기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베를렌도 여기서 종소리를 듣자 지난날의 아픈 추억을 회상하며 괴로워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거센 바람을 맞고 정신이 난 듯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의지대로 발을 옮기지 못하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죽은 나뭇잎처럼’ 쓸려 가겠다고 합니다. ‘Feuille morte’는 흔히 낙엽이라 번역되지만 불과 22살의 젊은 나이에 이 시를 쓰면서 베를렌이 마치 죽은 사람 같은 자기의 심정을 표현했기에 ‘죽은 나뭇잎’이 더 타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베를렌이 그처럼 사랑했던 사촌 누나 엘리자가 이 시를 발표한 지 불과 1년 뒤에 돌연 세상을 떠나 다시 베를렌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지난날 그렇게도 사랑했던 누나도 곧 죽어서 하나의 ‘죽은 나뭇잎’이 되어버릴 것을 시적(詩的) 상상력으로 예견하였기에 이 시의 마지막 시어(詩語)를 ‘죽은 나뭇잎(Feuille morte)’이라고 끝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며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2024.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