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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Sep 26. 2024

가을에 읽는 시(詩) 1

릴케의 가을날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게 명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
 그들이 완전히 무르익게 하셔서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도록 해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
 깨어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럽게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Herbsttag

                      Rainer Maria Rilke(1875~1926)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β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bren,
und auf den Fluren laβ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u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β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ns hat, ban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마흔 살이 넘어 다시 읽은 시

가을을 노래하는 시(詩)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시의 하나가 바로 릴케의 가을날일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 시를 처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땐 그냥 읽었을 따름이지 잘 이해도 못했고 왜 이 시가 그렇게 유명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마흔 살이 넘은 어느 가을날 밤 잠이 안 와서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보다가 릴케의 시집이 눈에 뜨였습니다. 민음사(民音社)에서 나온 작은 책이었는데 표지에 ‘검은 고양이 RILKE’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이 시집을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책을 열어보니 1974년 6월 20일에 샀다고 표지 다음 안 페이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1974년이면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시집을 사서 읽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시가 ‘가을날’이었고 그 옛날 읽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도 반가워 시집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와 꼼꼼히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이 책을 사서 읽었던 1974년에도, 잘 이해가 안 되었던 이 시가 마흔 살이 넘은 그때는 비로소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민음사 시집


릴케의 주(主)

 ‘주여,’라고 시작하는 이 시에서의 주(主, Herr)는 기독교에서 일컫는 주(der Herr)가 아닙니다. ‘주(主)’는 릴케의 다른 시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이 주는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예수가 아니고 릴케만의 신(神)입니다. 릴케는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라나면서 제도권의 종교와는 멀어졌습니다.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하면서 전통적 기독교 교리보다는 개인적 철학적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러므로 릴케의 시에 나오는 신(神) 또는 주(主)는 어떤 초월자가 아니라 릴케가 그것을 통해 삶을 완성시키고 싶어 하는 릴케 내면의 실존적 존재입니다. ‘주여’라고 부를 때 릴케는 스스로의 충만이나 성숙을 기대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는 너무 릴케의 주(主)는 누구일까에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편안히 각자가 평소에 생각하는 자기의 주라고 여겨도 이 시를 감상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여기서 나오는 ‘주’를 기독교의 신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절에 다니는 분은 부처라고 생각해도 좋고, 종교가 없는 분은 사랑이나 정신적 혹은 영적(靈的) 절대적 관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는 여전히 누구에게나 훌륭한 시가 될 것입니다. 릴케의 시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의 하나가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주여’ 다음에 나오는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는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도 많이 번역합니다

독일어의 ‘groβ는 크다길다높다넓다 등의 여러 뜻이 있으니 어떻게 번역해도 좋겠지만 저는 길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올여름은 무척 더웠을 뿐 아니라 구월 초까지 더워서 여름이 길었습니다. 언제 끝나나 했지만 그래도 때가 되니까 한두 차례 비가 내리며 가을이 왔습니다바로 앞 구절의 시간이 되었습니다와 문맥이 맞으려면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가 더 맞는 번역일 것 같습니다


그다음 절의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를 읽으면서 다시 ‘길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름엔 해가 비추는 각도 때문에 모두의 그림자가 짧습니다. 가을이 되면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라는 부탁은 시간이 되어 긴 여름이 끝나 가을이 와서 그림자가 길어지는 때가 되었으니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워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를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자연과 삶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

둘째 연에서는 자연과 삶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여름은 길었지만 그리고 시간이 되어 떠날 시간이 되었지만 그 긴 여름 속에서도 채 영글지 못한 열매들이 있고 포도주가 완성되기 위한 마지막 과정인 단맛을 준비하지 못한 존재들이 있습니다마치 우리 사회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흐름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자연이건 사람이건 이들도 모두 귀한 존재들입니다시인은 이런 존재들이 가을을 맞을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메마른 현대 사회에서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틀만 더의 따뜻한 손길이 뒤처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구절입니다.


드디어 가을

마지막 연은 드디어 가을입니다. 길고 길었던 여름이 가고 다가온 가을은 곧 닥쳐올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맞아야 하는 노년의 육신적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집은 육신이 거하는 껍질입니다.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생을 집 한 채 마련하다가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의 첫 절에서 여름은 참으로 길었다고 했습니다. 삶의 청장년 시절을 상징하는 그 긴 여름 내내 육신을 위한 집을 지었지만 시간이 되어 가을이 온 지금은 ‘혼자’인 사람이 됩니다. 육신의 집 짓기를 그만두고 비로소 정신적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혼자라는 독일어 형용사 ‘allein’은 ‘혼자 힘으로’라는 뜻도 있습니다. 삶의 가을이 오면 혼자이어야 하고 또 삶이 끝날 때까지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깨어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라는 구절은 정신적인 삶으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럽게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이라는 마지막 구절들은 육신을 가지고 피조물로 태어난 인간이 결국은 겪고 가야만 하는 삶의 마지막 불안한 모습을 묘사합니다. 종교적 삶의 바탕에서 벗어났기에 불안하지만 그런 가운데 스스로의 삶의 길을 찾으려 하는 시인의 실존주의적 면모가 엿보이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노년의 오솔길에서 다시 회상하는 릴케

윗글은 마흔 살이 넘은 어느 가을날 밤에 잠이 안 와서 릴케의 시 ‘가을날’을 읽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써 놓았던 글입니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훌쩍 넘은 지금 이 글을 보면서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보았습니다. 삶의 가을을 지나 어느덧 겨울의 초입을 들어선 지 꽤 된 지금 마흔 살 때의 내 감성과 자아를 존중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산수(傘壽)의 나이에도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때 다시 릴케의 ‘가을날’을 꼼꼼히 읽고 감상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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