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늙고 머리 희어지고 졸음이 많아져 불 곁에서 꾸벅거릴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시오, 그리고 꿈꾸시오 옛날 그대의 눈이 지녔던 부드러운 눈길, 그리고 그 깊었던 음영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매혹적인 우아함의 순간들을 사랑했으며, 진정이었건 거짓이었건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나요,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그대의 방황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갈 얼굴의 슬픔마저 사랑했다오.
그리고 벽난로의 붉게 빛나는 쇠 살대 옆에서 몸을 구부리고, 탄식하세요, 조금은 슬프게, 어떻게 <사랑>이 달아나 저 하늘 높은 산들 위를 걷다가 그만 별 무리 사이로 그 얼굴을 감추었다고.
When you are old
William Butler Yeats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예이츠는 영미 시단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입니다. 만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뛰어난 시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 사람의 소심한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는 예이츠가 23살 때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모드 곤(Maud Gonne, 1866~1953)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모드 곤은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주의자이며 또한 배우로 활약했던 다혈질의 행동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이츠는 몽상적이고 자의식이 강했지만 행동성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드 곤을 처음 만난 뒤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여자 중에서 그렇게 위대한 아름다움을 본 일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던 예이츠는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그녀는 사랑보다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했습니다. 1891년에 예이츠는 용기를 내서 그녀에 청혼했지만 거절당하고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다시 청혼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예이츠의 계속되는 청혼을 거절하던 모드 곤은 돌연 1903년에 존 맥브라이드(John McBride)라는 독립운동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23살 때 내 인생에 환난이 시작되었다,”고 예이츠가 고백했을 정도로 예이츠의 곤에 대한 사랑은 짝사랑이었습니다. 예이츠는 그래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녀가 맥브라이드와 이혼한 뒤에 다시 만나 또 청혼을 했지만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어느덧 60세가 된 예이츠는 35년 연하의 조지 하이드리스(George Hyde-Lees)와 결혼을 했습니다. 비로소 모드 곤과의 기나긴 사랑의 여정이 막을 내린 것입니다.
‘그대 늙었을 때’는 이렇게도 모드 곤을 사랑했던 예이츠가 26세의 나이에 쓴 시입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16세기 프랑스 시인 삐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의 시 ‘엘렌느를 위한 소네트’를 본받아 쓴 시라고 하지만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담하리만치 사랑을 강요한 롱사르의 시에 비해 예이츠는 이 시에서 때 묻지 않은 청년의 순수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첫째 연에서는 롱사르의 시와 같이 모드 곤에게 늙어서 내 책을 꺼내 읽으며 내가 시(詩)로 찬미했던 그대 눈의 아름다움을 꿈꾸어 보라고 합니다. 둘째 연에서 사람들은 순간에 불과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만을 사랑했지만 오직 한 사람 자기만은 그녀의 방황하는 영혼과 변해갈 얼굴의 슬픔까지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대문자 ‘Love’로 의인화(擬人化)한 <사랑>은 바로 시인 예이츠입니다. 그의 사랑을 거절하고 늙어서 난롯가에 졸고 있을 때엔 조금은 슬프게 탄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엔 <사랑>도 그녀를 떠나 높은 산들 위를 걷다가 별 무리 사이로 얼굴을 감춰버렸기 때문이라며 시가 끝납니다.
영어 원문을 읽어 보면 보다 더 이 시가 내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이 시에 나오는 and입니다. 결코 길지 않은 12행의 짧은 시인데 접속사 and를 11번이나 사용한 시인의 의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연에서 나오는 무려 6개의 and를 읽으며 우리는 시인의 젊은 연인이 천천히 늙어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우리도 그 책을 한쪽씩 읽는 기분도 듭니다. 둘째 연에서 두 번 나오는 and를 읽으며 그녀의 외모만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녀의 영혼을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마지막 연의 마지막 두 줄에 나오는 and는 독자들의 발도 천천히 산 위를 걷도록 하고 조금 뒤 별무리 사이로 얼굴을 감추는 시인과 같이 갈 여유를 마련해 줍니다.
또 하나는 이 시가 갖고 있는 운율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이 시를 읽어 내려가면 낮게 시작했다 높아지고 다시 낮아지는 이 시 특유의 운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의 각운(脚韻)은 첫 연이 p-k-k-p, 둘째 연이 s-u-u-s, 마지막 연이 z-d-d-z입니다. 이 각운을 눈여겨보면서 약-강-강-약의 운율로 천천히 읽어보면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여인이 옛 연인이 써 준 시를 읽으며 화롯불 옆에서 끄덕이며 탄식하는 정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와 같이 보면 좋은 시가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사랑하는 여인’이란 시입니다.
사랑하는 여인
폴 엘뤼아르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있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
그녀는 내 눈과 같은 빛깔,
그녀는 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조약돌 하나가 하늘 위로 사라진 것처럼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그녀의 꿈은 눈부신 빛으로 싸여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게 하고, 울고, 웃게 하고
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L'amoureuse
Paul Eluard
Elle est debout sur mes paupières Et ses cheveux sont dans les miens, Elle a la forme de mes mains, Elle a la couleur de mes yeux, Elle s'engloutit dans mon ombre Comme une pierre sur le ciel.
Elle a toujours les yeux ouverts Et ne me laisse pas dormir. Ses rêves en pleine lumière Font s'évaporer les soleils, Me font rire, pleurer et rire, Parler sans avoir rien à dire
폴 엘뤼아르는 보들레르나 랭보와 같은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며 또한 저항 시인입니다. 대표작으로 자유(Liberté)가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라고 끝나는 이 시로 그는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랑, 자유, 사회적 정의를 탐구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예이츠가 ‘그대 늙었을 때’에서 보여 준 청년의 순수한 사랑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남자들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영속적인가를 알려줍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엘뤼아르의 ‘사랑하는 여인’은 버림받은 남자의 깊고 큰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의 주인공인 ‘사랑하는 여인’은 엘뤼아르가 사랑했던 러시아 태생의 갈라(Gala)라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1917년에 엘뤼아르와 결혼했지만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사랑에 빠져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잊지 못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모습을 이 시에서 초현실주의 시인답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연에서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있고’라는 말은 떠나간 그녀를 잊고 싶어 눈을 감아도 그녀는 눈꺼풀 위에 있어서 계속 그 모습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했을 때엔 남자의 손길 따라 여인은 남자의 손 모습이 되었고 남자의 눈길 따라 여인은 남자의 눈 색깔이 되었지만 마음이 변하자 하늘로 날아간 조약돌처럼 남자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집니다.
둘째 연에서 떠나간 여인을 잊지 못하는 남자는 그녀가 항시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환상에 잠도 못 이룹니다. 그러면서 다시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꾸었던 꿈은 태양보다 뜨겁게 빛났다고 회상합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그녀가 없는 지금을 생각하면 울음이 나옵니다. 할 말이 없어도 이렇게 시를 써서 말하도록 만드는 여인을 생각하는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짧은 두 연의 시이지만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그녀(Elle)’라는 단어는 시인이 얼마나 가버린 ‘그녀(Elle)’를 애타게 그리워하는지 독자들이 시를 읽으면서 어느덧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이 글에서 두 편의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영국의 시인도 프랑스의 시인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한 사람의 남자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두 편의 시에서 잘 읽으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