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느를 위한 소네트와 증변승애(贈卞僧愛)
엘렌느를 위한 소네트
삐에르 드 롱사르(프랑스 시인 1524~1585)
‘그대 백발이 되어 저녁 촛불 아래서
실을 뽑고 감으며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
나의 시(詩)를 읊으며 감탄하며 말하리라
“그 옛날 내가 아름다웠을 때 롱사르가 날 찬미하였지”
그때 이 말을 듣고 일에 지쳐 반쯤 잠이든
그대의 하녀 중 롱사르란 소리에
잠 깨지 않는 이 없으리
그대의 이름을 불멸의 찬사로서 찬미했던 그 이름을 듣고서
나는 땅 밑에 묻혀 뼈 없는 유령이 되어
천인화(天人花) 그늘 아래 쉬고 있으리라;
그대는 난롯가에 웅크린 노파가 되어
내 사랑과 그대의 오만했던 경멸을 뉘우치리라
삶을 사시오, 내 말을 믿거들랑,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따 모으시오 오늘부터 생명의 장미를.
Sonnet pour Hélène
Pierre de Ronsard
Quand vous serez bien vieille, au soir, à la chandelle,
Assise auprès du feu, dévidant et filant,
Direz, chantant mes vers, en vous émerveillant:
Ronsard me célébrait du temps que j’étais belle.
Lors, vous n’aurez servante oyant telle nouvelle,
Déjà sous le labeur à demi sommeillant,
Qui au bruit de mon nom ne s’aille réveillant,
Bénissant votre nom de louange immortelle.
Je serai sous la terre et fantôme sans os
Par les ombres myrteux je prendrai mon repos;
Vous serez au foyer une vieille accroupie,
Regrettant mon amour et votre fier dédain.
Vivez, si m’en croyez, n’attendez à demain :
Cueillez dès aujourd’hui les roses de la vie.
롱사르는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시인들의 왕자(Prince des poetes)’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자연을 노래하는 참다운 서정시인이기도 했지만 ‘엘렌느를 위한 소네트’와 같이 특이한 방법으로 사랑을 노래하여 주목을 받았던 시인입니다. 시에 나오는 ‘천인화’는 미(美)의 여신 비너스에게 바쳐진 장수 상록수로 샹젤리제(Champs-Élysées, 행복한 영혼이 죽은 뒤에 가는 곳)에서 연인들을 위해 마련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에 따라서 또 나이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많은 분들은 지나간 삶의 여로에서 만났던 여인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여인들은 그냥 스치고 지나가듯 사라져 갔지만 몇몇 여인들은 아직도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 생각나는 여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엘렌느는 당시 왕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시녀로 20대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엘렌느의 약혼자가 전쟁터에서 죽자 슬픔 속에 사는 그녀가 안타까워 왕후는 시인 롱사르에게 그녀를 위로해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시인들의 왕자’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었기에 엘렌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엘렌느와 가까이 지내면서 롱사르는 어느덧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롱사르는 이미 50대에 접어든 중년의 노인이었습니다. 엘렌느도 롱사르의 시를 좋아하고 또 인격적으로 그를 흠모도 했지만 30년이란 나이 차이는 그녀로 하여금 쉽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롱사르가 쓴 시가 바로 이 ‘엘렌느를 위한 소네트’입니다.
‘내가 나이 들었다고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너도 늙으면 나의 늙음을 경멸했던 너의 오만을 뉘우칠 것이다. 그때 나는 죽어 땅 밑에서 편히 쉬겠지만 백발의 노파가 된 네가 난로가에 웅크리고 앉아 옛날 아름다웠던 너를 찬미했던 나의 시를 읽으며 감탄해 보았자 헛된 일이다. 그러니 내일을 기다리며 우물거리지 말고 바로 오늘 내 사랑을 받아들여라.’는 시입니다. 시인의 대담한 사랑의 고백과 그 기백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남과 여의 사랑은 꼭 서로 비슷한 조건에서만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이, 외모, 가문, 학력, 재력 등 여러 조건이 있지만 비등한 상태에서 만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형편이 좀 기운 쪽이 기가 죽어 사랑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애원하듯 사랑을 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노시인 롱사르는 오히려 큰소리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외칩니다.
贈卞僧愛(증변승애)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한시(漢詩)가 있습니다. 조선 제일의 시인이라고 칭송을 들었던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가 지은 贈卞僧愛(증변승애)입니다.
澹掃蛾眉白苧衫(담소아미백저삼)
訴衷情話燕呢喃(소충정화연니남)
佳人莫問郞年歲(가인막문랑년세)
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이십삼)
(澹掃: 곱게 단장하다. 訴衷: 속마음을 이야기하다. 燕呢喃: 제비가 지저귀듯 말하다)
곱게 단장한 눈썹에 흰모시 적삼
마음속 정다운 말을 제비가 지저귀듯 속삭이네
아름다운 사람이여 내 나이를 묻지 말게
오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네
어릴 때 신동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총명했던 자하(紫霞)는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 병조 호조 참판을 지냈을뿐더러 시(詩) 서(書) 화(畵)에 두루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습니다. 자하의 학문과 풍류를 흠모하여 변승애라는 젊은 여인 <기녀(妓女)라는 말도 있다>이 곁에서 모시면서 지필묵의 심부름이라도 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가까이 지내는 사이 그녀의 그에 대한 흠모가 애정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고 자하가 젊은 변승애에게 이 시를 써서 주며 간곡히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롱사르는 30년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어떻게 하든 젊은 엘렌느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엘렌느를 위한 소네트’라는 시를 지어 그녀의 마음을 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시인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5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젊은 여인 변승애의 앞날을 생각하여 곡진하게 거절하려고 贈卞僧愛(증변승애)의 시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과연 누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롱사르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50대였던 그는 사랑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엘렌느를 놓치기 싫어서 이런 시를 썼을 것입니다. 한편 젊은 변승애의 사랑은 순수한 것이었지만 자하는 70이 넘은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의 마음으로 거절의 시를 쓴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얻기 위하여 시를 지었고 또 한 사람은 사랑을 거절하기 위하여 시를 지었습니다. 이 두 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 속에 흐르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가슴속으로 흘러듭니다.
202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