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무어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여름의 마지막 장미
토마스 무어(아일랜드 시인, 1779~1842)
여름의 마지막 장미
홀로 남아 피어 있네;
아름다웠던 모든 벗들
시들어 사라졌네;
같은 속(屬)의 꽃도,
장미 꽃봉오리도 가까이에 없어,
붉은빛을 되돌려주거나
한숨에 한숨으로 답해 주지 않네!
너 외로운 장미여, 난 네가
줄기에서 시들도록 놓아두지 않으리:
아름다운 벗들이 자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자러 가렴.
그래서 친절히 나는 너의 잎들을
화단에 흩뿌린다,
정원의 네 벗들이
향기도 없이 죽어 누워있는 곳에.
나도 곧 따라 가리,
우정이 식고,
사랑의 빛나는 동아리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떨어져 나가면!
참다운 마음들은 시들어버리고,
정다운 이들이 사라져 버리면,
아! 이 삭막한 세상에
누가 홀로 살려고 할까? (번역 필자)
The last rose of summer
Thomas Moore
‘Tis the last rose of Summer,
Left blooming alone;
All her lovely companions
Are faded and gone;
No flower of her kindred,
No rose-bud is nigh,
To reflect back her blushes
Or give sigh for sigh!
I’ll not leave thee, thou lone one,
To pine on the stem;
Since the lovely are sleeping,
Go sleep thou with them.
Thus kindly I scatter
Thy leaves o’er the bed
Where thy mates of the garden
Lie scentless and dead.
So soon may I follow,
When friendships decay,
And from Love’s shining circle
The gems drop away!
When true hearts lie withered,
And fond ones are flown,
Oh! who would inhabit
This bleak world alone?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는 아일랜드의 시인입니다. 그는 아일랜드의 민요를 영어로 옮긴 시집 "아일랜드 멜로디" (Irish Melodies)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위의 시를 음악에 부쳐 아일랜드 민요 곡에 맞춘 노래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베토벤이나 멘델스존 같은 음악 대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이 곡을 도입하거나 변주곡을 만들어서 더욱 유명해진 시입니다.
이 시를 음악에 맞춰 노래로 불러도 좋지만 시 자체도 너무 아름답고 의미심장합니다. 늦여름에 혼자 남아 피어있는 마지막 장미를 친구들이 모두 가버리고 혼자 남은 노년의 사람으로 의인화하여 그가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을 노래한 이 시는 특히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것 같습니다.
오늘날을 백 세 시대라고 하며 오래 사는 것이 굉장한 행복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야 행복하지 나 혼자만 살아있다면 여름의 마지막 장미처럼 외롭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외로움에 지쳐 한숨을 내쉬어도 주변에 한숨으로나마 답해주는 친구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장미가 안쓰러워 이미 땅에 떨어져 죽어 있는 친구들에게 가서 잠들라고 권합니다. 가지에 매달려 시들어 죽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친절하게 꽃잎을 뜯어 친구들이 향기마저 잃고 죽어 있는 화단 위에 뿌려주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과 장미는 하나가 됩니다. 마지막 장미가 가지에서 시들어 고통스럽고 추하게 죽지 않고 그 향기가 아직 살아있을 때 꽃답게 죽도록 꽃잎을 따서 화단에 뿌린 뒤 시인도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정다운 이들이 사라져 버리면,
아! 이 삭막한 세상에
누가 홀로 살려고 할까?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노년이 되면 내가 늙어가는 것도 슬프고 외롭지만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주변에 같이 지내던 가족 친구 친지들이 하나씩 내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곧 내게도 다가올 운명을 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떠날 때마다 외로움은 더욱 커집니다.
시인은 ‘아! 이 삭막한 세상에 누가 홀로 살려고 할까?’라고 한탄하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삶이 허락하는 한 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끼리 손에 손을 잡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Paul Valéry)가 그의 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에서 ‘바람이 인다! ----어쨌든 살아야 한다!’라고 했듯이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약해지고 외로워도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끝까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혼자 사는 연습도 해두어야 합니다.
혼자 남은 장미가 시들도록 놓아두지 않으려는 토마스 무어의 안타까운 마음을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도 가졌나 봅니다. 그렇기에 영랑도 그런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의 시의 계절은 가을이 아니지만 그 속에 흐르는 시심(詩心)은 가을이기에 여러분과 같이 보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金永郞, 1903~1950)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장미 못지않게 화려한 꽃이 모란(牧丹)입니다. 아일랜드의 시인 토마스 무어는 장미가 모두 지고 마지막 한 송이 남은 것이 안타까워 여름의 마지막 장미라는 이름의 시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김영랑 시인은 봄내 기다렸다 피어난 모란이 오월의 하루 무덥던 날에 떨어져 시들어 버린 것이 아쉽고 섭섭해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장미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마지막 장미가 사라지면 ‘아! 이 삭막한 세상에 누가 홀로 살려고 할까?’라고 탄식하는 토마스 무어의 마음과 모란이 지고 말면 한 해가 다 간 것 같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라고 한 김영랑의 마음이 읽는 사람들에게 같은 울림을 줍니다.
모란이 떨어져 시들었을 때는 여름이지만 그때부터 다음 해 봄이 와 모란이 피기까지 ‘하냥 섭섭해 우는’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가을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언제 읽어도 아름다운 시지만 가을에 읽으면 더 시인의 마음과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2024.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