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가난한 시절을 살아본 사람만이 가난한 연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무엇이라도 주고 싶지만 가진 것은 빈 주머니와 맨주먹뿐일 때의 안타깝고 애타는 마음은 가난했던 연인들 모두가 한 번쯤은 겪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때 가난의 의미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겠지요.
예이츠가 26살 때 쓴 시 ‘그대 늙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34살 때 쓴 이 시도 그가 평생 사랑했던 짝사랑의 여인 ‘모드 곤’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여자 중에서 그렇게 위대한 아름다움을 본 일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모드 곤을 만나는 순간부터 운명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던 예이츠였습니다. 하지만 모드 곤은 그의 간절한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예이츠의 애타는 마음이 이 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기에 시인은 하늘의 천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 천은 해와 달의 빛인 금빛과 은빛, 그리고 밤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繡)가 놓인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깔의 천이라고 합니다. 밤과 빛과 어스름(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에서 빛은 낮을 어스름은 동트기 전 새벽과 어둡기 전 저녁을 뜻합니다. 운(韻)을 맞추기 위해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로 썼지만 뜻은 하루 온종일 24시간을 뜻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그녀만을 생각하는 사랑으로 짜인 천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가난하여’라고 한 것은 물질적 가난보다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주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언젠가 그대에게 사랑받을 꿈만은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 꿈을 그대 발밑에 깔겠다는 것은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춰 사랑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사뿐히 밟으소서’는 사랑하는 이를 아끼는 애틋한 어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대가 밟는 것이 아직도 사랑을 구하는 나의 꿈이니 깨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인 것입니다.
이십 대에 쓴 시 ‘그대 늙었을 때’에서 많은 사람이 그대를 사랑한다 했지만 오직 한 사람 자기만은 그대의 방황하는 영혼을 사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뒤 몇 년 동안 계속 사랑을 거절당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늘의 천까지 빌어 사랑을 간구하는 예이츠의 애틋한 마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월의 진달래꽃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지만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이츠는 평생 한 여인을 사모했지만 사랑을 얻지 못하여 애를 태우면서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는 내 꿈을 밟는 것이오니’와 같은 시어(詩語)로 애타는 사랑의 미련(未練)을 표현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시를 써서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사랑의 한(恨) 또는 체념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입니다. 누군가는 소월이 예이츠의 시 ‘그는 하늘의 천을 소망했다’에서 시상을 얻어 진달래꽃을 썼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소월이 진달래꽃을 통하여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는 사랑의 마음은 예이츠의 시보다 더 애절하고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음이 한이든 체념이든 미련이든 역시 우리의 것이기에 더욱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이 아닐까요?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입술이 열려 소리를 내서 낭독하게 됩니다. 이 시에 내재해 있는 음악성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입술을 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 행이 합해서 혹은 독립된 한 행이 모두 7.5 조의 운율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잘 맞아 입안에서 자연스레 구르는 7.5조의 운율로 인해 시의 구절구절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게다가 다정한 사투리 혹은 토속어인 역겨워(싫어서)와 즈려 밟고(짓밟고)가 우리를 한 걸음 더 시의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만일 ‘나보기가 역겨워’ 대신 ‘나보기가 싫어서’라고 썼거나 ‘사뿐히 즈려 밟고’ 대신 ‘사뿐히 짓밟고’라고 썼다면 소월의 진달래꽃은 우리의 애송시가 못되었을 것입니다.
예이츠는 상상의 날개를 펴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라고 했지만 소월은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낭만적이며 또한 역설적인 발상입니다. 가지 못하게 하려고 가는 길에 재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부디 곱게 가시라고 꽃을 길에다 뿌리는 모습은 마음속에 그리기만 해도 아름답고 곱게 다가옵니다. 가는 길 막고 옷자락 붙잡고 울며불며 못 가게 하면 오히려 뿌리치고 가기가 쉽겠지만 부디 잘 가시라고 가는 길 위에 꽃을 뿌려주고 살포시 돌아서 눈물을 감추고 서있다면 과연 갈 수 있을까요?
가실 길에 밟고 가시라고 꽃을 뿌려주는 둘째 셋째 연과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첫 연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마지막 연이 모두 합해져서 체념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합니다. 아마도 소월은 이런 승화된 체념으로 결국은 가시려던 님이 마음을 바꾸어 가기를 포기하고 남아있도록 하려고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달래꽃을 짓밟으면서 가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지 말라는 직접적 만류보다 한결 뿌리치기 힘든 아름다운 체념의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남아 있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