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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씨 Jul 21. 2024

2만 8천원에 죽음을 사세요.

5분 만에 죽을 수 있는 스위스의 안락사 캡슐 '사르코'

스위스 ‘안락사 캡슐’ 2만8천원…다시 불붙는 조력사망 논쟁



사용방법은 간단하다. 안락사를 원하는 이용자는 정신 능력을 포함한 의학적·법적 요건에 따른 평가를 받은 뒤, 보라색 캡슐 사르코에 들어가 뚜껑을 닫는다. 기계에선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같은 질문이 흘러나온다. 대답을 마친 이용자에게 사르코는 “만약 당신이 죽기를 원한다면, 이 버튼을 누르세요”라고 안내한다. 이용자가 해당 버튼을 누르면 공기 중 산소의 양은 30초 만에 21%에서 0.05%로 떨어진다. 제작자인 니츄케 박사는 “사망하기까지 약 5분 정도 무의식 상태에 머물게 된다”며 캡슐 내 산소 수준과 환자의 심박수, 혈액의 산소포화도 등을 밖에서 모니터링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버튼을 누른 뒤 마음을 바꿔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부연했다.




죽는 것이 더 쉬워진다면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서 저걸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삶의 포기를 더 쉽게 돕는 것이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길은 아닐까?

하지만 전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내 힘듦을 포기할 권리를 박탈당해야 할까?



다 떠나서 내게 저 걸 절대 선택하지 않겠냐?라고 물었을 때 0.001초만에 바로 당연하지!라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불행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당장의 우울감이 영원히 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죽음이 아주 싫거나 두렵지는 않다. 친구들과 농담으로 ‘내일 지구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내일 당장 죽어도 크게 상관은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전히 마음은 그러하긴 하지만 올 3월 친구의 죽음을 겪고나서는 ‘죽음’ 자체 에 대한 무게를 실감해서 말로 뱉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친구는 갑자기 걸린 유방암 때문에 큰 수술을 했는데 완치 판정을 받았고 여럿과 함께 3월에 발리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갑자기 1월에 재발해서 휴직 처리도 못하고 여행도 취소하고 급하게 휴가를 쓰고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경과가 좋지 않았다. 젊어서 암세포가 너무 빨리 퍼진 탓에 온몸 곳곳, 심지어 혈액에까지 암이 퍼져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너무 힘들어서 더이상의 연명치료를 받지 못하겠다고 선언했고 친구 언니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자로 마지막을 대신 전해주었다. 하지만 우리 08동기에게들 만큼은 직접 전하고 싶다면서 내일을 기약했는데 그 내일이 친구에게 오지 않았다. 

친구가 우리에게 마지막을 직접 전할 수도 있었을 내일인 3월 17일 아침에 우리는 친구의 부고를 받았다.



친구는 많이 살고 싶어했을까? 자신이 못 다한 것과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아쉬웠을까? 감히 그 마음이 짐작조차 되지 못한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게 철없는 만용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죽음에 대한 말을 아끼는 이유다.


아직도 친구의 목소리가 생생하고 매번 모임에 빠지지 않던 차가워 보이지만 수줍고 따뜻한 친구의 모습도 생각난다. 당사자의 마음은 짐작하지 못해도 남겨진 사람에게 죽음은 너무 아프고 슬프다.




친구가 떠나고 친구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이야기가 뭔지 톡방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마도 친구가 암 재발을 다시 알았을, 많이 아팠을 때에 보낸 내 생일 축하 메시지가 보였다. 이 메시지를 핸드폰 배경과 인스타그램에 걸어놓고 항상 기억하며 지키고 살려는데도 쉽지 않은 순간이 자주 온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 내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똑부러지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게으르고 현실감각도 떨어진 철부지인 것만 같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 나의 감정과 가치관보다는 그 사람에게 맞추는데 온통 관심이 가 있다. 나 혼자로 뭔가 든든하고 만족스럽지 않으니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 또는 가족을 이루어 잘 지내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못지 않게 노력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보다 앞선 길을 가는, 잘나 보이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다. 아직도 나만을 위해 사는 게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때 그 상황에서 저 말을 내게 해준 친구가 너무 고마워서 평생 친구의 응원을 지고 '나만을 위해' 살아보기로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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