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당대의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을 그리며 지었다는 시조다. 서경덕은 노령을 핑계 삼아(?)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녀와 연인의 정 대신 사제의 정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진이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노리지 않고 처음부터 스승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조에서 황진이가 그리는 대상도 서경덕이 아닐 수 있다.
하긴 서경덕이면 어떻고 다른 남자면 어떻겠는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랑인가다. 내 마음은 산처럼 요지부동인데 님의 정은 물처럼 머문 흔적도 없이 흘러가 버리는 사랑. 그렇다. 이 시조는 불공평한 사랑 얘기다.
(source: glitterandgrace.tumblr.com)
시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겠지만 내게 이 시는 짝사랑의 집대성이고 완결이다.
사랑은 어차피 판타지라지만 짝사랑만큼 처절한 판타지도 없다. 이 시조의 초장과 중장이 짝사랑의 현실이라면 종장은 그 판타지다. 시인은 물이 흐르는 소리를 물이 청산을 못 잊어서 우는 소리 소리로 듣는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믿고 싶을 뿐. 짝사랑은 혼자만의 판타지를 빼면 남는 게 없다.
누구나 한 번쯤 짝사랑을 한다. 처음부터 혼자 사랑할 수도 있고, 함께 사랑하다가 한쪽이 먼저 식어서 짝사랑이 될 수도 있고. 짝사랑은 영원히 마르지도 질리지도 않는 소재다. 이름만 바뀔 뿐. 황진이 시조에서는 청산과 녹수고, 한용운 시에서는 나룻배와 행인이고, 심수봉 노래에서는 항구와 배다. 화제가 되고 글이 되고 드라마가 되는 사랑 얘기는 대부분 짝사랑 얘기다. 대상이 엇갈리는 짝사랑, 타이밍이 엇갈리는 짝사랑, 또는 삼각사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짝사랑.
쌍방향 사랑은 당사자들은 행복할지 몰라도 보는 입장에선 지루하다. 동화에서도 파란만장 끝에 일단 둘이 맺어지고 나면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는 말로 서둘러 끝내버린다. 영국 극작가 패트릭 마버(Patrick Marber)의 작품으로 1997년 영국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적으로 흥행한 연극 <클로서(Closer)>에는 관계의 시작과 끝만 나온다. 사랑의 중간에는 아무도 관심 없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시작과 끝이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서도 비극적인 짝사랑을 하는 에포닌의 노래가 행복한 여주인공 코제트의 노래보다 유명하다.
영화 <클로서>의 앨리스와 댄 (source: wifflegif.com)
짝사랑을 버티는 힘은 판타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현실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다른 일들이 아무리 잘 풀려도, 심지어 부귀영화를 누려도 마음이 지옥 같다. 그래서 님의 곁에 있거나 님도 나를 사랑해주는 판타지로 탈출한다. <클로서>의 앨리스는 진실을 외면한다. <레 미제라블>의 에포닌은 ‘혼자만의(On My Own)’ 상상에 빠진다. 그 판타지가 깨지는 순간 사랑도 끝난다. 댄은 기어코 앨리스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앨리스는 외면해온 진실을 강제로 마주하는 순간 댄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보상 없는 사랑에서 해방된다. 에포닌은 마리우스 대신 총알을 맞는다. 그 순간 상상이 현실이 되어 그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거두고, 고통스런 사랑도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