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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란 Sep 27. 2022

팔자에도 없는 서울살이를 하게 된 이유

1- 늦깎이 대학생이 되다

    팔자에도 없는 서울 살이를 하게 되었다. 때는 작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안간다고 쌩고집을 피울 땐 언제고 냉혹하고 차가운 사회에서 2년을 굴러보니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대학'이라는 안정된 소속감이 있는 집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어디 한국에서 대학가기가 쉬운 일이던가. 매년 11월이면 전국은 60 만명이 넘는 수험생들이 모여 시험을 치루고 그 하나의 시험으로 대입에 대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바로 수능이다. 나에게 있어 대학을 간다는 건 그 지옥 같은 수험 생활을 다시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능이 너무 보기 싫었던 나는 난데없이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겠다고 한다. 약 1년간 나름 열심히 준비해보았지만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말 그래도 택도 없었다.



    수시를 넣었던 모든 대학에서 탈락한 나는 완전히 절망하여 우울의 끝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실용음악과 정시를 지원하기 위해서 봤던 수능 시험 성적이 나왔고 찾아보니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있었다. 물론 나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를 놓은지 어언 3년이 되었고, 작년 수능 시험을 볼 때 나는 말 그대로 문제집의 문자도 보지 않고 시험을 쳤다. 그러니 당연히 성적이 오를 리는 없었고 다만 운이 좋게 내가 잘 본 과목들을 통해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있었다.


    온 가족이 팡파레를 울렸다. 안 그래도 실용음악과에 가는 것에 반대했던 부모님은 이참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잘 됐다며 대놓고 좋아하셨다. 나는 사실 수능이 보기 싫었을 뿐 인문계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일이 꼬일 때는 죽어라 꼬이더니 풀릴 때는 또 이렇게 풀리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며 축배를 들었다. 사실 조금은 웃기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우울증, 자살 충동이 올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시 정신과에 다니기도 했고 끝이 보지 않는 암흑과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사실 수시에 붙었다면 정시에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을 지원하지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전화위복인 셈이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잘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합격한 대학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지금 집과는 정확히 반대 방향이고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야 했다. 왕복 3시간의 통학. '그래, 못할 것도 없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학교를 다닌지 두 달 만에 사라졌다. 첫 학기에는 다행히 비대면이어서 어찌어찌 견뎠지만 다음 학기부터는 대면학기로 바뀌면서 주 5일 학교에 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어떻게든 다녀볼만 했지만 주5일은 다닌 지 일주일 만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2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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