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스포트라이트>부터 2020년 <기생충>까지
기생충(Parasite)
영화 <기생충>의 역대 수상내역을 검색해봤더니 일일이 세어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 1월 19일을 기준으로 해외 영화제 및 시상식 등 총 174개 내역에서 상을 거머쥐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었던 상은 단연 '아카데미 4관왕'이다. 이는 한국 영화사 101년 만에 처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 국내에서는 이미 천만 관객을 돌파한데 이어서 오는 26일, 흑백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카데미에서도 외국어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최초이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수상 이후 상영관을 2배로 늘리는 등 종횡무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생충>은 국내에서 지난 5월에 개봉했으나, 본인은 당시 미국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그마치 10월이 다되어서야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능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기생충> 관련 기사나 유튜브 콘텐츠가 올라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크롤을 내렸고, 지인들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끝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관람한다'라기보다는 '영접한다'는 마음가짐에 가까워져 있었다. 현지인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찾아간 뉴욕의 한 AMC 영화관, 영화가 시작한 지 약 10여분 정도가 지나자 웬 십 대 무리가 상영관에 들어와 스크린을 향해 욕을 해대고는 저들끼리 깔깔대며 자리를 떴다. 영화 마케터를 꿈꾸는 나는 이 사건으로 하여금 두고두고 열을 올렸기에 <기생충>의 지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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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 (Green Book)
영화 <그린북>은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이후 논란이 가장 많았던 작품들 중 하나일 듯하다. <그린북>은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운전수였던 안토니 발레롱가의 실화를 다룬 내용인데, 안토니의 친아들인 닉 발레롱가가 프로듀서 겸 작가로서 골든 글로브에서 각본상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닉은 과거 무슬림 혐오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영화 <그린북>이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았다. 또한 돈 셜리 박사의 가족들에 의하면 닉과 <그린북> 제작진들은 영화 제작 전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돈 셜리 박사가 안토니 발레롱가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밝혀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화 <그린북>이었지만 오롯이 작품 자체로만 평가한다면 이들의 수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러닝타임 중간중간 나오는 환상적인 피아노 연주곡들과 돈 셜리 박사와 안토니의 케미스트리는 관객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할 것이며, 동시에 세계적인 아티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부당한 대우들을 당해내는 주인공의 아이러니한 상황들은 관객들을 분개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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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Shape of water)
오늘 다룰 다섯 개의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자 유일한 청소년 관람불가 작품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영화 제목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영화 초반에는 '인간과 괴생물체의 사랑'으로 보였던 주인공들의 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체와 생명체의 사랑'으로 느껴지고, 어떤 모양이든지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모양이 없이 담기는 물체에 따라 형체가 변하는 물처럼 사랑은 상대방의 모습, 그리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은 말을 할 수 없는 설정으로 대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눈빛으로, 손길로, 몸짓으로, 말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서로를 어루어 만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당시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기록인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총 4관왕의 영예를 얻었다. 당시 경쟁작들은 덩케르크, 레이디버드, 겟 아웃,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으로 작품상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해였다. 리서치를 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셰이프 오브 워터>의 95%가 세트 촬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감독은 비가 계속해서 오되 따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장면들은 심해에 잠긴 듯 채도가 매우 낮고, 축축한 기운이 가득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실험실에서 괴생물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부터는 붉은색이 사용되는데, 그 미묘하게 따뜻한 순간들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모른다. 특히 샐리 호킨스가 버스 창문에 기대어 차창에 가득 맺힌 빗방울들과 교감하는 듯한 장면에서는 신비로움과 황홀함, 그리고 설렘의 복합적인 감정이 함께 교차한다.
문라이트(Moonlight)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역대 최악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작품상 시상자가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라고 쓰인 여우주연상 시상 카드를 잘못 전달받았으나 시상은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라라 랜드> 팀이 수상소감까지 마친 이후에야 작품상이 <문라이트>였다고 밝혀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문라이트>는 이 날 작품상과 각색상을 수상했으며, 후안 역으로 출연한 마허샬라 알리는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러닝타임만을 두고 보았을 때에 그는 약 15분 정도밖에 출연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어서 마허샬라 알리가 아닌 후안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영화 <문라이트>는 인종차별과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줄거리는 주인공 샤이론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따라 크게 '리틀-샤이론-블랙', 세 덩어리로 나뉜다. 샤이론이 '리틀'이었을 때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안은 '달빛 속에서는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인다.', '무엇이 될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그 결정을 미뤄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대사는 영화의 제목뿐만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가 돋보였던 영화 <문라이트>,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게 전부였던 작품이다. 마약상이었던 후안은 샤이론의 아버지 역할을 하지만 결국 세상을 떠나고, 가족이라고는 하나뿐인 어머니는 마약에 찌들어 산다. 후안이 세상을 떠나기 전 무엇이 될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건만 샤이론은 결국 후안과 같은 마약상이 되고, 오랜 친구였던 케빈에게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어린 소년이 본인에 대해 알아가고, 남과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샤이론이 결국 마약상이 된다는 전개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적어도 나는 '무엇'이 될지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이 단순히 성 정체성에 대한 것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멘토인 후안도 이러한 결말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그로 인한 비극에서 작품성을 느낀다면 할 말이 없겠다.
스포트라이트(Spotlight)
매사추세츠 주 가톨릭 교회에서 10여 년간 벌어진 아동 성추행 사건과 그를 끈질기게 취재하여 미국 최고의 언론상인 퓰리처상을 받은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마크 러팔로, 레이첼 맥아담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수상작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유일하게 처음 들어보는 영화였다.
앞서 소개한 네 편의 수상작들이 감성적이거나 추상적인 성격을 띤다면 <스포트라이트>는 그와 완전히 반대된다. 충격적인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대게 사건 당시의 적나라한 상황이나 피해자들의 감정 상태를 묘사하는데 열을 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사건을 조사하는 이들과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집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적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범죄를 묵인한 로 추기경이 사임 이후 다른 가톨릭 교회로 재발령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보스턴 이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교회 성추행 범죄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나 이슈가 되었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으려면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둥 비아냥 대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러한 영화들은 관객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재미있다, 재미없다와 같은 단순한 감상에서 벗어나 특정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거나 개인이나 사회에 변화를 촉구한다. 어제까지는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이가 <그린북>을 본다면 오늘은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어제까지는 주변의 범죄를 알면서도 묵인하던 이가 <스포트라이트>를 본다면 오늘은 입을 열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영화가 가진 선한 영향력이다. 나는 아카데미가 작품상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기특한 시도들을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