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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혜진 작가 Sep 01. 2023

할머니의 전시는 내 꿈이 되었다

[내 일을 해나간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돕는 과정이다.]

우리 공방에 오는 분들의 연령은 대부분 30,40대이다. 가끔 20대도 오긴 하지만 원데이 클래스를 체험하러 오는 분들인데, 그 연령대의 수강생은 정말 어쩌다 있는 일이다. 운영하는 내가 40대이기도 하기도 하기에 공간의 이미지도 딱 30,40대에 맞춰져있지 않을까 싶다. 보이는 글과 그림 모두 말이다.

그런 이곳에 연령을 높인 분이 찾아오셨다.



6월, 여름이 시작되고 정규반 수강생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어느 날. 60대 정도로 보이는 분이 공방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여기 그림 그리는 곳이죠?"


그림이 사방에 걸려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으니 그림 그리는 곳 맞다. 그렇다고 말씀을 드리자 스케치도 배울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아크릴화 클래스를 주로 운영하기에 스케치 클래스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고려해 본 적도 없는 물음에 순간 머리와 입이 버벅거렸다. 안될 건 없지만.


"스케치를 배우러 오시는 분은 안 계셨는데, 어떤 걸 그려보고 싶으신 걸까요?"


나는 그림 전공자가 아니어서 스케치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 원근법이나 비율은 눈으로도 가늠이 가능하지만, 혹여나 내 실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실 수도 있지 않나. 나의 상황을 내가 잘 알기에 어떤 수준의 스케치를 원하시는지 일단 여쭈어보았다. 내 능력 이상의 것을 배우기 위해서 이렇게 오신 거라면 나는 정중하게 거절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알려드릴 수 있지만, 해본 적 없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며 사람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 손자가 이제 4살인데, 아기 상어를 좋아해요. 집에 놀러 오면 매번 그걸 그려달라는데 내가 진짜 그림이라고는 못 그려서... 그거라도 잘 그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쁜 손자가 아기 상어를 그려달라고 했고, 그림에 감각도 소질도 없는 할머니는 어떻게든 사진을 보며 그려줬는데 원본과 그림이 너무 달랐다고 한다.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장면이 그려졌다. 아이들이 할머니는 영어도 모른다고 무시하는 말을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게 떠올랐다. 손자는 할머니 그림 못 그린다고 당연히 말했을 거고 할머니는 속이 상하셨을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아기 상어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것들을 누가 알아보게만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할머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손자를 위해서 그림을 배우러 올까. 더구나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간단한 스케치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여름의 시작, 할머니의 그림도 시작되었다.



"선생님한테 자랑할 게 또 있어요"


1주일에 한 번 할머니와 만난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셔서는 매주 같은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 1주일 동안 혼자 그린 그림을 보여주려 스케치북을 열고, 그간의 노력을 보여주신다. 날짜까지 기재하며 거의 매일 작은 거라도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오시는데 그 열정이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집에서 심심한데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도 잘 가고 집중할 것도 있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요즘 어깨가 아파서 운동도 못 가고 장마기간에는 또 나가지도 못하고. 그림 그리는 시간이 재미있다니까"


할머니는 그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셨고, 나와 만나는 날 그 그림들을 자랑하시며 스스로에게 뿌듯해했고,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다음 주에 그릴 것들을 골라 사진으로 찍어가셨다. 내가 진짜 못 그리는 걸 잘 아는데 이제 이렇게나 늘었다며 웃으며 이야기하신다. 기분 좋은 약간의 흥분감을 안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서.


3달 만에 간단한 스케치를 해내시고 어제 캔버스에 색을 채우는 단계로 넘어갔다. 붓으로 색칠하는 건 20년도 더 되었다며 긴장과 설렘을 온몸에 장착한 모습으로- 한 주 한 주 할머니의 실력에 나도 많이 놀랐다. 아니, 이렇게 노력하는데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여전히 하나 그려내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예전에는 "이건 어렵지 않을까?" 질문하셨다면 이제는 "그려볼까?"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림에 대한 할머니의 자신감도 많이 차올랐다. 


"저희 협회에서 가을마다 전시회를 하거든요. 이렇게 1년 꾸준히 그리시면 내년에 같이 전시하실 수 있겠는데요?"


늘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면 안 속는다고, 무료로 하는 그림 수업에 초보도 가능하다고 해서 가보면 늘 나만 초보였다며-그간의 자신이 경험한 그림수업에 대해 늘어놓으시며 자기는 진짜 보는 눈도 그리는 눈도 없다고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하셨다. 그런데 어제 전시회 이야기를 했을 때 아무 대답이 없으셨는데, 내심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으신 게 아닐까 싶었다. 마음에 담은 것은 언젠가 하게 되니까, 그 힘을 알기에 할머니께 꿈 하나를 심어드렸다.


꼭 전시회까지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손주를 핑계로 아이상어를 계기로 해내고 싶었던 그림에 대한 갈증을 이렇게 내가 도와드릴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림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시지만, 나는 오히려 나이 상관없이 열정과 꾸준함을 보여주시는 모습에 자극을 받고 있다. 내가 받는 것이 늘 크다. 


할머니에게 심어드린 전시회의 꿈은 나에게도 담겼다. 할머니의 그림을 전시하는 일, 1년 후 우리의 모습이 되도록 열심히 할머니의 그림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내 일을 해나간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돕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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