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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May 03. 2022

교생병 탈출기

10년 전, 4월의 신기루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성실한 경영학도로서 교직을 이수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하나의 보험이라는 생각으로 교직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이 전부였다. 대한민국의 교육과 미래의 인재들에는 무심했으며, 심지어 조금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체육특기생으로 만난 학교와 교사가 결코 유쾌하지 않았기에. 






교육에 대한 생각의 뿌리가 뒤틀리기 시작한 건 '교육철학' 수업을 들을 때부터였다. 경영학을 3년간 배우면서 내 안에는 차갑고 명료한 것들이 꽉 차 있었기에 학점이나 채우려고 온 건조한 학생에게 던져진 이야기들이 좀 난해했다. 효율성과 효과성, 타깃과 전략, 생산, 조직, 수익성과 같은 단어들로 얼어붙어 있는 강가에 '행복'이라는 불청객이 등장한 느낌. 어허-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야,라고 밀어내도 행복이라는 이 아이는 그저 헤헤 웃으며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 바닥을 쿵쾅거리며 뛰어다닌다.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행복하기 위함이에요.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교사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을 말하는 교수님의 눈빛을 분명히 기억한다. 행복을 교육하는 교수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업이 끝난 뒤 교수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진짜 교육의 목적이 행복을 위한 것이냐고. 교수님에게 답변이 왔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2012년 4월. 집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특성화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과목이 상업정보교육인지라, 조건에 맞는 학교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학교의 졸업생은 아니었지만, 감사하게도 교생으로 받아주셨다. 학교는 여고였고, 교생으로 온 사람은 8명, 모두 여자 선생님이었다. 여고에 온 8명의 여자 교생들. 어딜 봐도 흥미로운 요소는 없었으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신기한 한 달을 보냈다. 꿈보다는 신기루 같은 4월이었다. 다시는 내 인생에 없을, 처음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왜 나에게 멋진 4월을 주셨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답을 알면서도 괜히 물어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한다. 정신없이 버스들을 갈아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7시. 정해진 일과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며 남은 시간은 과제를 하거나 수업 준비를 한다. 지도교사이신 담임 선생님께서 요청하신 학생 상담도 한다. 학교에서 요청한 이벤트 준비도 하고, 대학교에서 교생실습으로 치르지 못한 시험을 대신해 과제도 틈틈이 한다. 얼레벌레 막차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2시. 다음 날을 준비하고 잠들면 새벽 1시가 된다. 이렇게 한 달을 보냈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3일 만에 끝났다. 그 이후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렇다면 나는 왜 버텼을까? 어떻게 버텼을까? 단순히 교생실습이라는 의무감이었을까? 선생님이라 불리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2012년 4월의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 분명한 것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내 안에 모든 가치관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한 것들, 내가 틀리다고 생각한 것들이 폭발적으로 가라앉았고, 엉망이 된 잔여물들이 일으킨 먼지바람에 그저 콜록대며 머리를 쓸었다. 






교생실습을 나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교생병'이라는 것이었다. 


교생병(敎生病)
[명사]
1. 교육실습생들이 일시적으로 겪는 마음의 병.
2. 학생들이 계속해서 보고 싶고, 교생실습 종료 후에도 교육실습생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교사'라 생각함.
3. 대학으로 돌아가서도 수업과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임. 


듣기만 해도 고약한 병이었다. 애초에 교직에 뜻이 없던 나에게 교생병은 비효율적인 관례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한 달 나갔다 온다고 해서 저렇게 유난을 떤다고? 했는데 그 유난을 내가 떨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교생실습 막바지로 갈수록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학생들, 동료 교생 선생님들과의 유대감은 꽤나 깊어졌고, 이러다 감정적으로도 힘들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나 수업을 통해서 느끼는 무언가는 아직까지도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저는 교생병 안 걸려요, 교직에 돌아올 일도 없습니다." 하며 떵떵거리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시는 안 만날 사람처럼 말이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가니, 산더미 같은 시험과 과제들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나의 전공 공부를 좋아했고, 빠르게 경영학도 모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4학년이라는 시간적 스트레스도 상당한지라 정신없이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었다. 교생병은 누가 걸리는 거야 대체- 하고 맞이하는 뜨거운 여름의 한 복판. 뜬금없이 나는 교생병에 걸려버렸다.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믿었던 것은 이때부터였나 보다.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들을 보면 내 무의식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어느새 전공 서적보다 더 많이 읽고 있는 교육 서적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교생실습 때 했던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살펴보고, 수업을 다각도에서 디벨롭해본다. 다시 하지도 않을 수업인데 말이다. 지금쯤 한창 시험공부 중이겠다 하며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본다. 한 명, 한 명,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그때 그 고민은 해결됐는지 궁금하다. 다른 이야기를 더 많이 해줄걸 괜히 마음이 아쉽다. 혹시나 상처되는 말을 했으면 어떡하지 하다가도, 판서를 너무 못한 것 같아 괜히 빈 강의실에서 연습도 해본다. 교생병이 맞네 맞아하며 유난을 떨다가도, 내가 지금 조심스럽게 꿈꾸는 것들이 맞는지 끊임없이 기도한다.


그렇게 겨울이 되었고, 교생실습을 했던 학교에서 상업정보교육 교사 3명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떴다. 2013년 3월. 나는 다시 학생들 앞에 서게 되었다. 교육실습생이 아닌, 교사로.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는 학교, 소속감과 애교심이 넘치는 선생님들, 교생들을 위한 체계적인 프로그램, 쿵짝이 잘 맞아 한 달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동료 교생 선생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마음 따뜻한 학생들. 사실 내가 교사를 꿈꿀 수 있었던 8할은 학생들 덕분이다. 그들이 나를 교사로 만들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내가 만났던 학생들이 아닌, 다른 학생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는 여전히 교생병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을까? 


4월이 되고, 4월이 끝이 나면, 형용할 수 없었던 한 달을 곱씹어 본다. 그들의 삶에 나는 겨우 한 달이었지만, 나는 그 한 달로 10년을 살아냈다. 10대의 끄트머리,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급식이 맛있어서 살이 많이 쪘다며, 하고 싶은 것이 없어 고민이라며 말을 걸어오던 그들이 나를 교사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불안정함이 때로는 누군가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다고, 이제 너희들도 그럴 차례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고맙다고, 꼭 그렇게 말하고 싶다. 








유월의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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