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소진되지 않는 운동에 대하여
기후운동할 시간에 방이나 청소해라
는 기사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기사 본문은 기후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겠지. 나는 저 댓글이 악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깥일이 더 중요하다며 살림은 놓치고 있던 내 안의 가부장을 마주한 고마운(?) 댓글이었다. 실제 기후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내 방은 늘 더러웠고 누군가 대신 치워주지 않으면 점점 처참해지는 지경이 되었다. 이 댓글 사건을 계기로 내 삶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그렇게 첫 독립을 결정했다.
당시 내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있었는데, S 언니네 빈집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언니의 전세대출 이자를 내가 월세로 내면 됐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 7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한때 바퀴벌레가 엄청 많았다는 소문을 듣고 거의 두 달을 머뭇거렸다. 가기엔 겁나고 남아서 부모와 지내자니 앎과 삶의 괴리가 커질 뿐이고. 언니가 집을 오래 비운 탓에 다행히 벌레는 없었다. 이제부터 내 손에 달렸다는 생각으로 머리카락 보일라 깔끔하게 산다. 청소의 명분에는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존재가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청소를 할 때면 나를 소중하게 살피고 돌보는 느낌이 든다.
혼자 사는 집은 구석구석이 내 방이고, 방은 내 마음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방이 어지러울 땐 내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이고 방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것과 같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아침에 벗어놓은 잠옷이 가만히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내가 안 치우면 아무도 치워주지 않는 집을 바라보며 이렇게 또 스스로를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방을 청소하면서 느낀 점은 기후운동 같은 의제 중심의 운동만큼 내 삶의 운동, 즉 일상에서 가치를 구현하는 운동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각의 메커니즘이나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변화되어야 비로소 의제에 뛰어드는 운동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지속 가능하다.
누군가가 의제라고 부르는 것에 반응하며 소진되는 운동은 이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방 청소는 미루면서 세상을 바꾼다고? 그동안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였던 내 운동은 순간적으로 뜨거운 열을 뿜지만 차가운 세상에 닿으면 바로 꺼지는 불이었다. 이제는 미지근함과 따뜻함 사이에서 사랑으로 오래 이어나갈 삶의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