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까진 아니고 행복하라!
"탈매직 OO개월 차 입니다."
곱슬모를 매직으로 펴지 않고 최소 1년 이상 기르면 마치 히피펌을 한 것처럼 특유의 컬이 만들어진다. 물론 곱슬모는 다른 모발에 비해 유독 건조해서 샴푸-드라이-에센스 전 과정을 세심하게 관리해야 자연스러운 컬이 유지되는데, 이 방법을 CGM이라 한다. 곱슬모를 가진 사람들(이하 곱슬이) 중에 일명 CGM(Curly Girl Method)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도전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만큼 결단도 과정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찰랑거리는 생머리 또는 살짝 웨이브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한 머리가 미(美)의 기준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한국에서 CGM을 시도하려는 흐름이 특히 반갑게 느껴진다. 사다리에 오르려 애쓰기보다 그 사다리를 과감히 치워버린 자들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이다. "생머리는 아름답고 곱슬머리는 지저분하다."는 오염된 명제를 거슬러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선택한 일부 곱슬이들이 존경스럽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철학으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혁명이 '함께'라서 가능했듯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로 연대(?)하며 탈매직의 길을 걸어가는 곱슬이들이 부럽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들에게 감동하는 이유는 나도 곱슬이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마다 약 2~30만원의 돈을 들여 매직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유효기간은 길어야 3개월. 이후 곱슬모가 눈에 띄게 자라면 고데기로 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다시 매직을 하곤 했다.
요새는 한 뼘정도 자라난 곱슬모와 미처 자르지 못한 매직모가 뒤섞여 헤그리드 선생마냥 부시시한 상태다. 이미 두 달 전에 매직했어야 했는데 괜히 버티고 있다. 잔뜩 성난 머리를 볼 때마다 쫙 펴고 싶은 충동이 차오른다. 그렇다고 매직을 하기엔 돈도 아깝고 미용실에서 불편한 소리까지 들으면서 4시간 넘게 앉아있기도 싫다.
이럴 땐 정당화라는 강력한 도구를 꺼내 위안 받을 준비를 한다. 아무것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 변명하기 위해, 곱슬이들이 탈매직에 도전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후기를 하나씩 읽는다. 나보다 곱슬이 더 심한 사람이 태반인데 다들 1~2년을 기다려서 탈매직에 성공한다. 곱슬모가 어느정도 자라기까지 버티기 어려웠지만 또 다른 곱슬이들의 탈매직 후기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간증이 넘쳐났다.
그냥 하던대로 선택하던 사람들이 누군가의 해방감을 엿보며 용기를 얻어 탈매직에 뛰어든다. 그 사람을 보고 다른 누군가 용기를 얻어 또 탈매직에 뛰어들고 그렇게 '우리'로 도달한다. 곱슬모에 대한 오지랖으로 고생했던 경험, 곱슬모가 자라며 일정한 결이 생겼을 때 느끼는 짜릿한 감정, 잘 기르다가 권태기 와서 당장 매직하고 싶은 답답한 심정, 마침내 매직모를 잘라내고 곱슬모만 남은 모습까지 공통된 서사를 공유하며 함께 변화하는 여정이 아름답다.
주제가 무엇이든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모인 조직은 지속 가능성이 남다르다. 조금 붕 떠도, 조금 부시시해도 괜찮다고 서로 다독이며 걸어가는 길이 어찌 쉽게 막히겠는가.
어쩌다보니 곱슬모를 기르고 있지만 내일 갑자기 매직할 수도 있다. 대신 오늘부터 모든 곱슬이들을 응원하기로 했다. 나처럼 별 생각 없이 기르거나, 버티다 못해 매직하는 모든 곱슬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내가 지닌 여러 정체성 중 곱슬이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곱슬이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겠다는 말이다.
잊지 말자.
"생머리는 생머리고 곱슬머리는 곱슬머리다."
만국의 곱슬머리여, 단결까진 아니고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