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수 Oct 25. 2022

삐빅, 당신은 전화 공포증에 걸렸습니다

전화: 의외로 쉬운 처방(?)

초등학생 때 잠깐 남들 다 한다는 전화 영어를 한 적이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영어 나라 사람'과 그 작은 꼬마가 20분 동안 무슨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하는 말을 원어민이 못 알아듣고 원어민이 하는 말을 내가 못 알아듣는 곤란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결국, 전화 영어 시간만 되면 가슴이 쿵쿵대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전화를 받기 싫었다.


하루는 수학 과외를 가기 전에 밀린 숙제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당시는 휴대폰도 없을 때라 알람은 꿈도  꿨고, 수업 시간이  되어서 과외 선생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그렇게 숙제도  하고 수업도 늦은 그날의 기억이 꽤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깨발랄했던 성격을 유일하게 모르는 과외 선생 앞에서 그동안 나름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그날 이미지 타격이 커서 그랬나? 그 후로도 과외 선생에게 전화가  때면 ‘이번엔  놓쳤나?’ 걱정부터 했다.


두 사건이 보여주듯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 탓에 순발력이 필요한 전화에 부담을 느끼곤 했다. 문자는 한참 고민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전화는 즉각적으로 매끈하게 반응해야 하니까.


전화가 두려운 또 다른 이유는 얼굴을 보고 대화로 하면 쉽게 풀릴 수 있는 일도 전화로는 왜곡될 소지가 다분해서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과 다툰 적이 있다.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비참한 감정을 견딜 수 없어서 배가 아픈 척 조퇴했다. 집에 와서 한 친구와 오해를 풀기 위해 전화를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대화하면 할수록 갈등은 깊어졌고 그 후로 우린 친구가 되지 못했다. 표정 같은 비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을 깨닫는 동시에 전화가 더 두려워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거나 어색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때 오래 머뭇거린다. 인턴 때는 "컴퓨터가 안 켜져요" 한 마디가 어려워서 IT팀에 전화하기까지 3시간을 고민했고, 고객과 통화할 일이 간혹 있을 때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가서 미리 써둔 대본을 줄줄 읽었다.


왜 전화할 때마다 경직되고 긴장할까? 이 취약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나는 전화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낡은 기억으로 새로운 나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봤다. 몸에 차곡차곡 지녀오던 오래된 생각의 무게를 창문 밖으로 벗어던지고 싶었다. 나는 살아 있으며, 한 순간도 같지 않은 모습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기억에 사로잡힌 상태로 오늘을 바라본다면 이 순간에만 발현되는 존재의 아름다움과 고귀함 따위를 느낄 수 없다.


전화 공포증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충 제쳐 두고 생각 없이 사는 거다. 그러다 전화를 걸거나 받을 상황이 찾아오면 어떤 기억도 꺼내지 않은 채 반겨주는 거다. 미리 걱정하면서 우회할 방법만 궁리할 바에 차라리 닥쳐온 파도를 그 자리에서 정면 돌파하는 방법이 낫겠다. 하다 보면 곧잘 하는 내가 아니었나.

작가의 이전글 더 넓은 회색지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