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류의 난제 앞에 발칙한 위트를 던지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 대응 정책을 촉구하며 한 목소리로 ‘떼창’을 하고, 기후재난과 생태학살에 침묵하는 정치권에 반기를 들며 한강에서 카누를 탄 40여 명의 청년이다. 얌전히 피켓만 들거나 점잖게 기자회견문만 읽지 않는다. 사람의 근력으로만 움직이는 무동력선 카누를 타고 한강에서 퍼포먼스를 벌인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성장‧개발 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지닌 위트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이유다.
지난 6월 15일 가뭄 중 ‘단비’가 내리던 오전, 청년기후긴급행동과 서울환경연합이 여의도 한강에서 카누 액션을 진행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라 그들의 행보를 오래전부터 응원했는데 마침 한강에서 카누를 탄다니. 심각한 기후위기에 맞서는 행동치고는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SNS를 통해 참가 신청을 했다. 전날인 14일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전달받은 두 가지 준비사항을 떠올리며 여의도로 향했다. 피켓에 적을 메시지 정해 오기. 기자회견 때 부를 노래 가사 외워오기.
흰 우비에 빨간 구명조끼를 입고 한강 둔치 주차장에 집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석탄발전소인 당인리 발전소와 국회의사당을 사이에 둔 곳이다. 전날부터 고심했던 메시지인 ‘생명답게 살고 싶다’를 적은 피켓을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카누 패들을 들고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현수막 앞에 서자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후재난과 생태학살을 외면하는 정치에 미래는 없다.”
이날 기자회견서 이우리(28) 서울환경연합 기후에너지팀장은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초고속 경제성장을 위해 철저히 외면당한 생태계의 신음을 기억해야 한다”며 올해 두 번의 선거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난개발 공약을 쏟아낸 정치인들을 향해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다양한 생명과의 공존을 택하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공멸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은빈(24) 청년기후긴급행동 공동대표는 ”전북 새만금 신공항 건설, 경남 하동 석탄발전소 유지, 동물들을 착취하는 축산업 현장과 육식 문화, 강원 인제 가뭄 등 수많은 생태학살과 기후재난은 전국 각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서울에서 기후 운동을 하며 지역 불평등을 절감하고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전국 그리고 지구 곳곳의 동지들과 연대의 손길을 잡고 싶다”라고 발언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카누를 탈 시간이 왔다. 우리는 2명씩 짝을 지어 트럭에서 카누를 꺼냈다. 빗물까지 담겨 꽤 무거운 카누를 들고 미끄러운 언덕을 지나자 비 온 뒤 불어난 한강이 보였다. 현장에 함께 간 친구는 어느새 중간에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로 활약하고 있었다.
카누 전문가에게 간단히 노 젓는 방법을 배운 뒤 차례로 한강에 진입했다. 카누에 탑승하면 서울환경연합 활동가 2명이 뒤에서 카누를 잡고 강으로 미는 방식이었다. 동력 장치 없이 노를 저어야만 움직이는 카누의 속도는 느렸다. 대신 쉽게 멈출 수 있어 원하는 방향으로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속도가 빠르면 방향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는 점에서 카누는 느림의 미학을 충분히 선사했다. 각자 움직이던 20여 대의 카누가 10분 후에 대열을 맞춰 한자리에 모였다. 기후위기에 침묵하는 자들에 저항하고 희망으로 연대하자는 의미로 카누 위에서 구호를 외쳤다. “기후위기, 외면하지 않는 자들에게 희망이 있다.”
다른 동년배 청년들은 어떤 이유로 카누 액션에 참가했을까. 권우진(21) 성공회대 학생은 "평소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청년기후긴급행동의 SNS를 보고 오게 됐다"며 “직접 카누를 타고 기후위기라는 무거운 의제를 유쾌하게 다루는 방식이 신선했다”라고 참가 소회를 밝혔다. 이어 "우리가 지구에 미치는 행동 전반에 대한 경각심을 길러야 환경 문제가 개선되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직장인 강동균(28)씨는 넷플릭스 다큐 '씨스피라시'를 보고 수중청소 봉사활동을 준비하던 중 이번 카누 액션에 참가하게 됐다. 강 씨는 "기후위기를 마주하며 비건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같은 이유로 비건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만나 큰 위안을 받았다"며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을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한강의 기적은 어제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곳 한강에서 또 다른 기적을 꿈꾸며 내일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깊은 뿌리 / 불어오는 바람 / 흘러가는 강물 / 드넓은 바다 / 내 몸에 닿는 지구의 숨결 / 내 영혼을 감싸네” 카누 패들을 하늘 높이 들고 불렀던 노래를 종일 흥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자들이 품은 힘일까. 국회 앞 한강에 울려 퍼지는 청년들의 '떼창'이 어느 쪽을 향해 흘러갔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