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그만보고 글쓰기 선언
최근에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일이 생겨 이 안에서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새로운 글 없이 방치된 내 브런치가 마음에 걸려 불편했다. '내 이야기를 써보겠어!'하고 야심 차게 도전해서 개설했는데 이렇게 버려진 모습이라니. 얼마 전엔 조금씩이라도 글을 써보자는 다짐을 하고 최근 30일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성공한 운동 얘기를 줄줄 썼다. 퇴고도 몇 번씩 하며 나름 시간도 들였다.
그런데 또 이렇게 쓰다간 언젠가 쓰기 싫어질 것 같단 말이죠. 다른 사람들 글과 비교하기도 하며 모름지기 브런치에는 전문적인 글이 올라와야 한다는 고집이 그대로 반영된 글이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쓰면서 즐겁진 않았다. 쓰기를 미루는 내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길고 전문적이고 잘 쓰는 능력이 아니라, 일단 써보는 능력인 것 같단 생각이 스쳤다. 결과가 어찌 됐든 간에 쓰는 습관에 근육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미친 것은 얼마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작업물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에세이가 압도적으로 좋다. 소설은 안개 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새벽의 축축한 느낌이라면 에세이는 윈도우 배경화면의 널따란 들판에 누워 바람을 느끼는 기분이다. 한없이 가볍고 경쾌하단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하하!>하고 소리 내어 웃는 경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을 때가 유일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물어보면, 별 시답잖은 얘기고 교훈이랄 건 없지만 그만큼 주제가 무궁무진한 데다가 그 사람 사고방식이 독특해서라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다. 그렇지만 별 시답잖은 가벼운 일화를 읽다가도 늘 한 대는 얻어맞고 동시에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부축까지 받는듯한 내용들이 분명히 있다.
초반부에 실린 <문장을 쓰는 법>에는 어떻게 하면 문장 공부를 하냐는 질문을 받은 하루키의 대답이 있다. "문장이란 것은 '자, 이제 쓰자'라고 해서 마음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스타일에 해당하는 글의 방향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라, 어딘가에 있는 스타일을 차용해 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하고, 문장을 쓰는 것 자체에 익숙해지지만 능숙한 정도에 그쳐 재주로 끝나고 나기 마련이다.
"그럼 그런 방향 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 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체와 거의 비슷하다. (중략) 그런 일들을 겪어보고 '쳇 뭐야, 이 정도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잘 쓰고 못쓰고는 제쳐놓고- 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상태다"
바로 뒤에 실린 <앞날의 일에 대하여>에서도 또 한방 먹었다.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새로운 소설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좋은 소설을 쓸 것. 그것이 전부다". 간 보지 말고 일단 써 본 다음에 생각하란 거겠지. 책 읽으며 무방비하게 하하 허허 웃다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순간이다. 쓰는 사람을 꿈꾸면서 지금 당장 쓰지 않는 나의 이 딜레마란 무엇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에세이를 쓰면서 브런치에 올릴 거라 이 상태로 못 올리겠다는 망설임은 무엇인가.
아,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1984년(에세이 원문집이 발간된 해다)의 일침에 한 방 먹고 이후로 이어진 가볍고 유쾌한 문장에 절여진 뒤 키보드를 두드릴 용기가 생겼다. 왜 이런 에세이를 보면서, 에세이를 이렇게 써도 된다는 걸 몰랐을까? 글을 업으로 하는 자는 글을 쓰는 게 쉬워선 안되고, 마냥 즐거워서도 안된다는데 그건 일단 나중의 일이다.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한 순서가 있겠지. 일단 저는 글쓰기의 단맛부터 보렵니다. 아휴 이거 쓰는데 재밌어서 혼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