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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Jun 18. 2023

녹음과 파랑과 푸르스름에 대하여

한강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를 읽고

나에게 한강이란 작가는 마음에 늘 품고 있으면서도

가끔씩만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어떤 책이 되었든 간에 한강의 책은

늘 약간의 망설임과 극복을 동반한다.


답지 않게 혼자 조용히 보내는 주말

최근에 알게 된 그의 시집을 읽었다.

역시나 명연 하고도 푸르스름한 슬픔의 세계다.

 

그가 환기하는 파랑이 너무 많아서

이따금씩 꺼내볼 수 있게 정리를 해본다.




1.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 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 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새벽의 파랑]

언젠가의 불면의 밤들이 생각났다.

아득하고 파괴적인 생각이 모이고 모이다가

밤을 뺏겨버리고,

억지로 감은 눈에 아침이 잦아든 날들.

부스럭거리는 본인의 몸짓이

저녁 잎사귀 같았던 날들이

내게도 많이 있었다.




2. 거울 저편의 겨울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중략>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너무 추워 사물들은 떨지 못해

(얼어 있던) 네 얼굴은

부서지지도 못해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비밀의 파랑]

갑자기 거울을 보다가 문득 슬퍼질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이건 정말 내가 맞나

부모님 얼굴을 볼 때도 친구들의 얼굴을 볼 때도 가끔 느낀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처절한 눈

주황 속에 푸르스름을 쬐는 불꽃의 눈도 그랬겠지




3.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꺠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후략>




[투명한 파랑 ]

시의 전문을 옮기자니 슬프고 아파서

녹음이 도드라지는 부분만 발췌해 왔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빛은

내겐 보기만 해도 벅찬 네잎클로버 같은 존재라서

초여름만 되면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는

대단한 풍경이라는 듯이 '저기 빨리 봐봐'

어린아이처럼 외치고 다니곤 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도 뾰족해질 수 있구나 싶다는 걸 알게 해주는 시.





4. 여름날은 간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들어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있었다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가장 좋았던 시.
몸을 떨며 울고, 내민 손 향해 놀라 돌아보는

연약한 잎사귀 같은 사람들의 시


저녁의 소묘, 육각형의 눈, 검푸른 흑백사진, 여름날의 잎사귀 다양한 풍경에 퍼져있는 파랑이 인상 깊다.

(내가 꽤나 다정하게 파랑을 좇는 걸지도?)


유난히 푸르른 시들을 읽으며 떠올린 그림. 샤갈의 바이올린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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