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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May 05. 2020

층간흡연 이웃에게 꽃을 선물했다

오피스텔에서 살아남기

아침 7시 20분.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주변을 더듬거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이씨!"


담배냄새에 혼자 또 열을 냈다.

나의 아침은 대개 이런 식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어느 날의 저녁 또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고 싶은 일요일 점심에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집안에서 담배를 태우고 마는 사람.

나는 그의 이웃이다.


분명 난 흡연이 금지된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관련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건 층간흡연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관리사무소에서는 가끔씩 층간흡연과 소음 관련 경고 방송을 내보냈지만 피해자인 내가 들어도 의미 없는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무력하게 붙어있는 관리소의 경고문을 비집고 여러 경고문이 붙었다.

경고문 핫스팟 엘레베이터

어떤 이는 주거 법과 세입자의 계약 해지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를 운운하며 A4용지를 꽉 채울 만큼 정성스레 분노를 눌러 담았다.


어떤 이는 엘리베이터 2대에 붙여 모두가 볼 수 있게끔 꼼꼼하게 일을 진행했는데 두 번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도록 워드를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어떤 이는 아침에 집 밖을 나서기 전, 급한 와중에도 넘어갈 수 없는 마음을 형광색 포스트잇에 쏟아부었다. 필히 신발을 신은 채로 작성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모두 호소보다 분노에 가까웠다.


이름 모를 작성자가 공중에게 쏘아대는 분노.

적대감이 묻어나는 메모는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먼저 그들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실내에서 흡연을 하는 건 길티 플레저(죄책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먹는 일)와 비슷하다고 상상해보았다.


본능에 굴복하는 자신을 목격하는 모습,

다음부터 절대 안 그래야지 다짐하는 모습,

다짐을 꺾으며 실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걸로도 모자라 이름 모를 타인에게 욕까지 먹어야 한다니. 층간흡연 빌런은 이미 악당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느끼고 있을 죄책감과 미안함을 적대감으로 지워낼 것이 아니라 미안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다정함과 따뜻한 말로 자극해보자.

일일이 손글씨로 적자니 힘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000호입니다.


익명에서 벗어나 나를 밝히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감정적인 표현을 자제하고 사실만을 얘기했다. "당사자가 아니시라면 같은 상황에 있으신 건 아닌 지 걱정된다"고 위로를 건네며 고통받는 다른 이웃을 상기시켰다.


작은 선물과 함께 늘 행복하시라는 덕담도 적었다. 진심이었다. 행복한 사람은 남들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는다고 믿어온 탓이다.


 '당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늘 행복하세요'


어색한 문법에 말을 좀 수정할까 고민했지만

원래 진심 어린 말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연거푸 독서를 시도하다 끝내는 포기하고 치워버린 소설책을 다시 집었다. 줄이 쳐져 있지 않은 페이지만을 골라서 오려낸 후 준비한 꽃을 포장했다.


꽃을 선물하는 일은 대개 기분 좋은 일일 때가 많아서 그런 지, 작게나마 남은 나쁜 기운도 함께 잦아들었다. 이 날을 경고문이 아닌 이름 모를 이웃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한 날로 기억하기로 했다.

꽃을 선물한 지 일주일이 되는 오늘

아직까지 담배 냄새가 난 적은 없다.


불편한 부탁 후 찾아오는 찜찜한 기분이나 불안한 마음도 없어 나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옆집에서 밤 12시에 급하게 나갔다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랫집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제 상관없다.


담배 냄새 없는 저녁 3일째, 축배를 들어보았다


그동안의 빌런이 누구였는지 파헤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 담배냄새가 올라온다면 어떻게 할거냐고 부모님이 물으셨다. 뭐, 함께 잘 살아보자 또 설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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