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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May 10. 2020

내가 시를 시작한 순간

솔직한 마음을 담은 어떤 말들은 시가 된다

뉴질랜드에서 유학하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반에 시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시를 직접 써서 선생님께 선물하기도 했고, 대부분 수업시간에 참여하지 않거나 딴짓을 하면서도 영미문학 시간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보조교사 없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그는 지체장애인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장애인 학생들이 특수반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어울릴 기회가 없던 나에게 그와 함께하는 반 생활은 굉장히 낯설었다. 학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점에서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종종 점심시간에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빠른 속도로 외계어에 가까운 영어를 내뱉는 친구들 사이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울 때, 또는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 넋두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혼자 앉아있는 그의 곁으로 갔다. 누텔라를 바른 샌드위치를 쩝쩝거리며 나는 내가 원하는 속도로, 생각나는 단어들을 멋대로 조합시킨 문장들을 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분명 시를 좋아하는 그는 내 문장 사이사이의 기나긴 멈춤과 공백을, 수많은 문법적 오류와 모순적인 단어 선택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내가 서툴게 말하는 방식이 그에게 시처럼 들리기를 바랐다.


그는 시에 관한 관심만큼 재능이 따라줬던 사람인 지라 학교의 지원을 받아 자작시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출간일보다 조금 일찍 그의 시집을 선물 받은 건 내가 1년이라는 길지 않은 유학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을 결심한 다음 날이다.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며 반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 날 나는 A4용지를 엮어 급하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아 'Poetry(시집)'이라고만 적힌 그의 초판을 받았다.


목차를 읽는데 '굿바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견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싶어서 휘리릭 넘긴 책장에는 태극기가 그려진 비행기가 뭉게구름 사이로 날고 있었다. 비행기의 작은 창문에 유일하게 그려진 탑승객인 소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이날을 평생 기억하게 되리라 본능적으로 느끼며 눈물 흘렸다. 그런 나를 보고 그는 "tears we smile(눈물 우린 웃어)" 라 말했다. 본인 앞에서 울다 웃는 나를 표현한 건지, 헤어지면 울게 되고 결국엔 또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건지 무수한 의미를 지닌 알쏭달쏭한 그 문장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완벽한 방식의 위로였다.


이후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진심을 고백하고자 할 때 시를 찾았다. 시는 문장의 길이가 너무 짧진 않은지, 비문인지 등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다. 문장의 외모를 고민하는 대신 어떤 마음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 더 집중하게 만드는 점이 좋았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 맞이한 어머니의 생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표현할 방법으로 시를 떠올렸다. 당시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나름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던 나는 오글거림을 질색했는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는 시를 통해 어느 정도의 느끼함을 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었다.


 '어머니'를 제목으로 정한 그 시에서 나는 꾸밈없이 어머니를 묘사했다. 가족들이 먹을 고슬고슬한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은 늘 온기로 가득했고, 아빠와 나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는 어머니에게선 스팀다리미의 깨끗한 향기가 났고, 이어 어머니의 시선, 말소리를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것들로 비유했다. 그렇게 온 감각으로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설거지하는 틈을 타 선물과 함께 준비한 시를 어머니의 서재에 두고는 재빨리 방에 돌아왔다. 살짝 열어둔 방문에 찰싹 붙어 어머니의 반응에 귀 기울이고 있었는데, 곧바로 내 방으로 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불이 꺼지지 않던 어머니의 서재로부터 다음날 답장이 왔다.

image by Marta Brzosko

아주 솔직한 마음이 담긴 어떤 말들은 시가 되고, 자기도 모르게 시가 된 말들은 사랑을 받는다.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은 나는 이런 시적 허용에 많이 기대는 편이다. 친구와 어머니가 보내온 답장을 통해서 서툰 표현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덕분이다. 진부하기보다 완벽하지 않은 말들을 하기로 선택한 나는 앞으로도 더딘 속도로, 남들보다 서툰 방식으로 시를 말하는 사람이 돼보려 한다.


Poetry is a story that is so good,

it doesn't need complete sentences.

-John S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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