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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Jun 16. 2020

정독할 필요 없이 떠먹는 예술

전시의 미래는 '피크닉(Piknic)' 같아야 한다

피크닉의 전시:명상에 대한 후기

마크 로스코 - 로스코 채플 벽화 (*국내 15년 전시완 다릅니다)

보라색으로 아득하게 채워진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거나, 3m가 넘는 실린더 속에서 작가가 주문한 대로 흐르고 있는 전류를 바라본다. 내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일상에 잠식되는 중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답다, 거북하다, 슬프다와 같은 즉각적인 감정에 압도된다. 수면 위로 떠오른 감정을 충분히 살피고 나서는 내가 놓치고 있는 느낌은 없을지 천천히 확인해본다. 평온으로만 가득 찬 장면에서 미세한 슬픔의 얼굴을 발견한다. 새삼 이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보고 있다니' 하고 스스로에게 놀란다. 이후에는 여전히 작품을 보고 있지만 작품을 보고 있지 않다. 슬픔의 이유가 작품이 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잠시 생각하길 제쳐둔 일상을 꺼내어 끼워 맞추어 본다.


예술은 나에게 여러 감정들을 켜켜이 쌓아나가는 과정이자 다시금 해체하는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예술이 주는 위안은 경이롭다.


이런 쑥스러운 표현마저 거침없이 쓰게 만들 만큼 나는 예술을 흠모하고 감상하길 즐긴다.


인상주의를 모아놓은 전시의 예 (예술의전당)

이런 방식의 감상이 찾아오는 전시회는 흔치 않다. 전시의 구성이 감상자의 감정선을 생각하기보다는 작품의 표면적 공통성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대개 그림을 그려낸 작가, 그림에 쓰인 기술, 그림에 영향을 준 시대 등이 전시의 주제가 되는데, 모두 그림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속성일 수 있겠으나 작품의 감상보다는 이해를 위한 장치에 가깝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Techy 한 방식으로(스마트폰 앱과 QR코드를 통해서), 아주 세련된 폰트와 인테리어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어느 시대 보다도 정확도가 높고 친절한 설명을 읽어 내려가면서

작품을 이해하고 있다.


값어치를 해야 하기 때문인 것인지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빠른 시간 내에 지나치게 만드는 전시에서 예술은 읽는 것에 가까웠다.

신생 문화 공간인 '피크닉'의 이번 전시 ‘명상'은 시대, 성별, 명성, 성향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감상자의 명상 체험이라는 단일 주제를 위해 존재한다. 작품 곁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여느 전시와 마찬가지로)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작품을 경험하는 것을 절대 뛰어넘지 못했다. 하나의 공간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만 쓰였기 때문이다.

레스토랑 메뉴판. pinterest

읽는 전시는 마치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보는 것과 같다. 폰트를 2 사이즈 정도 키우고 볼드 처리한 음식의 이름, 빽빽하게 적힌 그에 대한 설명을 거듭해서 읽고는 맛을 상상해본다. 메뉴판을 읽고 상상하는 일이 끝이다. 음식을 시켜서 오랫동안 음미하는 일은 읽는 전시에 포함되지 않는다.


체험하는 전시는 다르다. 메뉴에 대한 간단한 정보는 제공되지만 중요 포인트가 아니다. 이미 돋친 입맛에 대한 책임을 응당 지겠다는 자세. 더불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작품을 배치한다는 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충분히 미식할 수 있도록 요리마다 포크와 나이프, 스푼도 달리 세팅하고 배경 음악과 조명까지 바꾸는 것과 같다. 감상자에 대한 복합적인 배려가 깃들어있다.


피크닉의 하늘

'명상'은 관람자의 동선과 작품의 배치도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다. 전시는 지하에서 시작되어 하늘에서 마무리되는데, 층별의 높이 - 관람자의 시선 - 명상을 통해 닿는 세계가 일체화되어 함께 움직인다.

박서보 - 원오브제로 콜라보레이션 작품 ‘원 오브 제로’ ,         (C)Brique Magazine

거친 바닥면에 송출된 '죽음'과 관련한 영상을 바라보는 것을 시작으로 전시는 박서보의 원오브제로, 계단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을 거쳐 상층으로 향한다. 감상자의 시선도 점차 위를 향한다. 수행자의 길을 통해 발에 감각을 깨우며 중심으로 향한다. 이후, 안개가 자욱한 명상의 방을 겪고 마침내 하늘에 다다른다. 동선, 공간, 작품의 의미와 그들의 관계가 지닌 명료함에 감탄했다.

가짓수가 많지 않아도,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몰빵한 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전시가 될 수 있다.  '전시'라는 낡은 정의에 갇히지 않을 때 감상자 또한 고전적인 감상법 '읽는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피크닉의 초기 전시와도 확연히 달랐다. 나의 바깥에 존재하던 전시물들이 체험을 통해 내 안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하늘에서의 명상은 다도와 함께할 수 있다

다양한 작품을 조화시키고, 끊임없이 재탄생시키며, 정교한 논리로 감상자를 빠져들게 하는 방식.


21세기의 예술은 훨씬 더 고도화된 편집자가 필요하다. 피크닉의 전시 기획팀 글린트가 그 역할을 선도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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