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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Jun 01. 2020

이 세상엔 끝내 없을 내 아이에게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한번쯤 해주었을 이야기


너는 이 세상에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래도 평행세계같은 곳에서라도 네가 살아 움직인다면 생각할때가 있어. 너는 어떤 얼굴일까. 어떤 목소리로 웃을까. 나와 닮았을까, 아니면 아내와 닮았을까, 우리 둘을 닮았다면 고집이 세겠구나, 완고한 입매를 하곤 그 음식은 맛이 없으니 먹지 않겠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할때가 있어.


갑작스럽게 편지같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세상엔 앞으로도 없을 네가 이 곳이 아닌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면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변덕처럼 들었기 때문이야.


사실 화분 하나도 제대로 오래오래 키우지 못하는 내가 아이를 키우다니.

가능했다고 한들 너를 품에 안기를 결심하기는 아주 진 고민이 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이런 글은 너를 만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겠지. 어쩌면 기만에 가까운.


내가 살고있는 이 세계엔 봄이 지나 여름이 성큼 다가온 계절이야.

어릴땐 이런 계절엔 계곡으로 가서 아버지가 잡아준 가재를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나네. 계곡물은 차가웠지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 기묘한 생물들을 볼 수 있어 즐거웠어.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선 더이상 가재를 보고 신기해서 몸 속에 웃음소리가 뛰어다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기가 어렵곘지만.


글쎄, 대부분이 그래. 어떤 일에도 그렇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거나 정말로 즐거워 깔깔 웃을 일이 사라져가지. 세상에 모든 이야기들에 심드렁해져. 동화는 너무 오래 전에 내 속에서 바싹 말라 흔적만 남은 잉크자욱처럼 보이지. 마법도 요술도 난쟁이도 공주도 왕자도 없는 삶이야.

심지어 산타할아버지도 말이야.


최근 집으로 향하던 퇴근길에 네가 우리 부부에게 존재했다면 어땠을지 막연하게 상상해봤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미안하게도 잔혹한 현실이었단다. 행복한 상상보단 절망적인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건 나의 고질적인 결점이니 네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태어나서 울어대면 지금도 가뜩이나 체력이 뚝뚝 떨어질만큼 힘든 회사생활에 내가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까. 너에게 방해받는 나의 시간을 내가 용납할 수 있을까. 너에게 주어져야 할 무수한 기회와 물건들을 위한 비용을 내가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일까. 나이가 들어 늙어갈때까지 책임져야 할 너의 존재를 내가 과연 짊어질 자신이 있기나 한걸까.


이 세상에선 너를 키울 수 없다는 핑계로 적당하게 안정적으로 벌면서 우리 둘만의 생활을 안락하게 꾸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너의 존재가 우리 부부에게 과연 기쁨이기만 할까. 그냥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겠거니.


한참 일에 집중하다가 퇴근하던 길이라 한층 더 염세적으로 너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몰라. 알겠지만 나는 미련이나 후회같은걸 정말 싫어하거든.


그렇지만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던 내가 사라진 자리엔 바스락거리는 감상만 가지고 최소한의 일상을 수행하는 내가 남았다는 걸 느꼈을때, 역시 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어. 아내와 쏙 닮아도 좋고, 나를 닮아도 좋고, 우리 둘을 적당하게 섞어서 닮아도 좋겠지. 어떤 모습이든 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마법도 요술도 잊지 않고 너의 생 속에 그런 것들을 불어넣으며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싶더라.


내가 아버지처럼 가재를 잡아 보여주면 너는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거나 만져보고 놀라워하거나 그럴테지. 네 세상에 우리는 가재를 태어나게 만들고 앨리스를 태어나게 만들고 해리포터를 태어나게 만들겠지. 네게도 그것들이 환상 속으로 푹 잠길 수 있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조금은 놀라워하면서.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그 세계에 너와 함께 떠나면서 이 삶이 조금은 덜 건조할런지도 몰라.


'나는 너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이었어.'

언젠가 내 엄마가 나에 대해 쓴 일기장을 기억해. 나는 그 문장을 읽을땐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 역시 너를 만난다면 너를 통해 이 세상을 다시 살게 될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벚꽃이 피는 곳을 걷거나 바닷가를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그런 일상이 내겐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그저 안락함과 평온함을 준다면, 그 모든 과정들을 난생 처음 마주하는 너를 보며 우리에게도 그것이 처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거야. 마치 다시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곤 그냥 단순히 그 생각 끝에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글을 쓴 것 뿐이지.

사실 이 문장만은 망설였는데.

너를 만난다면 이 세상따위 다 의미가 없어질만큼 너를 사랑하게 될거라는 걸 알아.

우리는 너를 만날 준비같은건 하지 않았어. 너를 원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거든. 우리 부부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인지도 모르지. 우리 곁에 네가 살지 않도록 애초에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거 말이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네게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을 찢어놓으니까.


"왜 날 낳았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엄청난 절망 속에 빠질테니까.

네게 그런 말이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해서 나는 너를 이 삶에서 만날 용기가 없어.


그래서 너는 이 세상에는, 이번 내 삶에는 끝내 없을거야.

그렇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서 너는 무척 사랑받고 있는 아이이기도 해.

너는 상상 속에서 그저 깔깔 웃고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 가슴을 다 찢어놓을만큼 사랑스러우니까. 앞으로도 가끔 그럴거야.

우리가 앙상해지고 머리카락이 다 하얗게 새고 등이 굽고 눈이 침침해져도 가끔 너를 생각하게 될테고 그러면 우리 부부는 너를 또 사랑하겠지.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만큼 조금 더 슬프다고 생각하겠지.


네가 어딘가의 세계에서 그 세계 속 우리와 살아가고 있다면 네가 항상 행복하기만 했음 좋겠어. 그 세계의 우리도 이 세계의 우리도 너의 행복만을 바랄테니 너는 분명 울거나 웃으면서 춤을 추듯 가뿐하게 그 삶을 살겠지.




이 세상엔 끝내 없겠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해. 그러니 오늘 밤도 행복한 꿈을 꾸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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