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파김치·총각김치, 그리고 김장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진 음식 가운데 하나가 단연 ‘김치’다. 일품요리만 찾던 어린 시절에는 가치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생일상에 김치가 올라오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이 맛있는 음식들 사이에 저건 뭐지? 하는 심정으로. 젊어서는 술자리에서 삼겹살과 함께 구울 때와 라면을 먹을 때 말고는 딱히 찾은 적이 없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허전해도 그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김치가 없으면 좀체 밥상이 밥상 같지 않게 여겨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깊은 맛을 감각할 줄 알고, 더구나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 나에게는 대체로 김치가 그러하다.
엄마는 내가 결혼한 후부터 늘 우리 집의 ‘김치’를 신경 썼다. 처음에는 김치만 신경 쓴 건 아니었다. 나와 통화를 하거나 마주 대할 때마다 엄마는 어제 뭘 먹었는지, 오늘은 뭘 먹을 것인지 궁금해 하곤 했다. 또한 집에 뭐가 있는데 가져다 먹겠느냐고 자주 전화를 걸곤 했다. 그래서 나는 신혼집에서 걸어 십여 분 남짓한 거리의 엄마 댁을 수시로 들락거리곤 했다. 엄마 눈에는 그저 철없어 보이는 아이 둘이 소꿉놀이하듯 가정을 꾸렸으니,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꼭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다. 물론 아내와 나는 철은 없었을지언정 아이는 결코 아니었으며, 나름 규모 있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저 엄마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열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십여 년 가까이 운영하던 작은 공장을 폐업한 이후 40대 중반부터 엄마는 우리 집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해 노년에 접어들고 나서도 여전히 돈에 쪼들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언제까지나 아버지와 형의 삼시세끼를 챙겨야 하는 독박 가사노동에 매여 있었으며, 거기에 형이 이따금씩 저지르는 사고를 수습하느라 늘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시달렸다. 그나마 내가 결혼해 숟가락 하나를 줄인 것만도 엄마에게는 큰 위안이었을 터였다. 그 와중에 둘째 아들네 냉장고까지 챙긴다는 건 그야말로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내가 2년 만에 엄마 댁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로 이사했으므로, 이제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사실 엄마가 우리 집 냉장고를 신경 쓴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내도 나도 직장 생활에 얽매였을 뿐 아니라 퇴근 후에는 노느라 바빴던 시절이었다. 식사는 주로 바깥에서 해결했고, 가끔 집에서 먹더라도 배달 음식이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가공 식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김치만큼은 없어선 안 되는 것처럼 항상 챙기길 멈추지 않았다. 멀어진 거리만큼 자주 볼 일도 없었지만, 엄마는 가끔씩 이어진 통화 끝이면 언제나 김치가 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모처럼 엄마 댁에 가는 날이면 미리 전화를 걸어 김치 통을 가져오라고 이르곤 했고, 가져간 빈 통 대신 김치가 가득 채워진 새 통을 건네주길 반복했다. 그 일은 내가 결혼한 후 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엄마는 마지막 몇 년을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다. 찜질 기능이 있는 복대를 사다 드리기도 했고, 몇 차례 한의원과 병원에 모시고 다녔음에도 나는 엄마의 기력이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엄마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결국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했던 엄마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무심한 아들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수술을 받기 한참 전부터 체력이 달리고 거동이 불편해 더 이상 아들에게 김치를 주지 못했던 엄마는 종종 나를 볼 때마다 아쉬워했고 한편으로는 미안해했다. 나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신경 쓰지 말라고, 늘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했다. 없어도 그만, 정 먹고 싶으면 마트에서, 인터넷으로 구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생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김치를 찾기 시작했고, 때로는 겉절이를 때로는 신 김치를, 때로는 총각김치와 파김치와 깍두기를 그리워했다. 어떤 계기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김치는 중요한 음식이었고, 반드시 필요할 뿐 아니라 항상 올려야 하는 반찬이었다.
김치에 유난해진 건 공교롭게도 가평 시골로 이사 온 즈음부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싸고 만족스러운 김치를 먹을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하게 됐다. 그 동안 김치 걱정 없이 살았던 게 얼마나 복에 겨운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가 기력이 쇠해 더 이상 김치를 받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가평에 살면서 나는 여전히 김장철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니, 알고 보니 김장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거의 모든 집에서 삼삼오오 이웃끼리 친척끼리 날을 잡아 대대적으로 김장을 담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도 어느 집에서 김장을 담근다는 소식과 함께, 빈말일지언정 와서 김장도 담그고 수육도 먹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더구나 일손이 되지 못하는 우리는 고사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낮이면 우리 집 앞에는 어김없이 김치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이웃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우리 집 냉장고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김장 김치는 늘어났다. 이러다가는 마당을 파고 장독대를 묻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농담을 아내와 주고받기도 했다. 찌개를 끓이고, 만두를 빚고, 찜을 해 먹고도 남을 만큼 김치는 차고 넘쳤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 내가 가평으로 이사 온 지 2년이 조금 넘어서의 일이었다. 이웃으로부터 김치를 얻어먹기 시작한 건 한참 후였을 것이다. 몇 해 전 살림을 시작한 뒤로는 기왕 하는 거 못할 건 또 뭐가 있을까 싶어 나 역시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깍두기부터 시작해 파김치, 겉절이, 총각김치 등을 거쳐 두 해 전부터는 조촐하게 김장도 직접 담그고 있다.
김치는 그 어떤 요리보다 정성과 노력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설계도가 필요하다는 건 모든 음식이 마찬가지지만, 한 번에 큰 규모로 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 번 담근 음식을 적어도 한 달 이상 먹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해보니 언제 김치를 담그고 어떻게 적절한 맛을 내고 시간이 지나 담근 김치를 처리하는 것까지 모든 게 중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잘 익은 김치를 함께 맛보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았다. 식구들에게, 손님들에게 정성이 담긴 김치를 내놓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알았다. 김치를 신경 쓴다는 건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일임을, 알았다.
엄마에게, 아들 집 김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다.
김치는 다듬는 것이 절반이다. 흙 묻은 쪽파를 정성껏 다듬는 일이, 총각무의 잔뿌리를 쳐내고 무청 끝부분 돌려 깎고 흙 묻은 부분을 털어내고 시래기를 정리하고 무 세척하는 일이 김치 담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김장은 그 종합편이고. 그래서 시간이 부족할 땐 깍두기를, 제법 여유로울 땐 파김치나 총각김치를 담그곤 한다.
김치를 담글 때 포인트는 단연 양념이라고 생각한다. 양념은 언제나 넘치게. 괜히 아꼈다가는 허여멀건 맛없어 보이는 김치가 된다. 깍두기도 파김치도 총각김치도 순서는 매한가지다. 잘 다듬은 주재료를 일단 소금에 30여 분 이상 절인다. 무 세 개, 쪽파 두 단, 총각무 두 단이면 소금 한 컵이면 된다. 절인 재료가 짜다 싶으면 물로 행구면 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양념은 배 또는 사과 한 개, 양파 한 개는 갈고, 액젓과 다진 마늘, 매실 청은 모두 1대1 비율로, 설탕은 그보다 조금 적게, 고춧가루는 그보다 3배 정도 넣는다. 나는 대략 5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 담그는 김치가 아니면 풀죽을 넉넉히 사용하는 편이다. 그래야 걸쭉하고 끈끈한 양념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끔 풀죽을 쑤는 게 귀찮을 때면 찬밥 반 공기를 믹서에 갈기도 하는데, 이때는 밥을 충분히 불린 다음에 해야 밥알이 곱게 갈린다. 양념의 소로는 양파, 쪽파, 부추, 무청 등 그때그때 저렴한 재료를 사용한다.
라면에, 떡에, 식구들에게는 수육에 잘 담근 김치를 내놓는 건 정말이지 설레는 일이다. 잘 익은 신김치로 찌개를 끓이거나 볶음김치를 만들면 두세 끼가 든든하다. 올해 담근 김장으로 꽉 찬 냉장고를 보면 여간 든든하지 않다.
나는 이제 김치를 신경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