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20대까지 내 시간과 돈과 정성을 쏟았던 곳에 다녀왔다.
나와 딸을 보고서 앉아있던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모여 반겨주었다.
매주 보았던 익숙한 사람들이 내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격하게 반겨주었다.
내가 중학교 때 선생님이었던 분
내가 가르친 제자의 어머니
함께 봉사하며 교회를 섬겼던 어른들이었다.
중학교 1학년에 되는 해 친구의 전도로 다니게 된 동네 아파트 상가의 지하교회.
교회 생활은 허기진 내 마음에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 당시 엄마는 외국으로 떠났고, 아빠는 먼 직장을 다니느라 자주 볼 수 없었고, 오빠는 집에 없었다.
우리 집은 텅 비어있었고, 대화조차 없었으며 나에게 주어진 역할도 없었다.
10대 때는 재밌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면
20대 때는 주일학교 선생님, 피아노 반주자, 청년회장, 찬양단 리더 등 역할로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하며 존재감을 느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교회에 가면 할 일이 널려있고,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많고,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나에게 교회생활은 가뭄 속 단비였다.
나는 모범생 신도로 술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목사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일도 없었다.
예배마다 천 원씩 헌금을 하는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며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기도했고,
첫 직장 월급 전체를 키보드 헌물을 했다.
새벽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철야도 신앙의 기본이라 생각하며 참여했다.
그러다 30대가 될 무렵 상담대학원을 다니며 인생을 돌아보고,
의문점 없이 순종만 했던 신앙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
내가 왜 그토록 교회에 목숨 걸듯 헌신했나?
내 결핍을 채우려고?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내 신앙의 실체는 뭘까? 혼란스러움의 극치를 달렸다.
교회 설교는 성경의 말씀과 목사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는데
기독교 상담에선 의문을 가지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달 후 교회를 떠났다.
교회를 떠나기 전 목사님과 두세 차례 상담을 했다.
목사님은 청년회장이나 반주자의 역할을 안 해도 된다고 하며 설득하고, 붙잡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쓰나미 태풍이 몰아쳐 모든 게 뒤집어진 혼란의 시기여서 소용없었다.
혼란을 거쳐 하나님, 종교, 신앙을 다양한 관점으로 보며 시야가 넓어졌고,
교회를 옮겨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동안 쓰나미 같은 태풍은 어느샌가 수습되었고, 가뭄의 단비를 찾는 허기진 마음도 잦아들었다.
10년 만에 내 청년기의 고향, 친정 같은 교회에 혼자가 아닌 셋이 되어 교회에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리에 살다가 1시간 30분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마지막으로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내려가는데 지하의 쾌쾌한 냄새가 났고, 곳곳에 교회의 흔적들이 여전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목사님, 사모님, 몇몇 집사님들, 청년부 시절의 언니들과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살이 붙은 내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인다고 하며 흐뭇해하시고,
함께 신앙 생활했던 추억이 많은데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해주셨다.
목사님 손을 꼭 잡으며 너무 뵙고 싶었고, 그리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제자 훈련받으며 독후감을 썼을 때
목사님이 내 별칭을 애정을 담아 불러주며 사랑한다고 보내준 메시지에 감동하고,
수련회에서 청년들과 포옹하며 눈만 봐도 진심 어린 눈물이 흘렀던 순간들,
매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기 전 목사님 가족과 찬양전도사님과 했던 저녁 식사의 따뜻함,
라섹수술을 했을 때 같이 병원에 가주셨던 집사님들과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아 하루라도 빨리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한가득 양분을 가득 채워준 곳.
신앙의 사춘기가 오기까지 나를 키워주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발돋움이 되어준 곳.
어둡고, 축축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줬고,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던 곳.
친정과 다름없는 우리 교회는
내 소중한 추억의 일부로 굳게 자리 잡아
어디선가 지하의 내음이 풍길 때 사무치게 그리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