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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e우먼 Mar 21. 2021

irony #01 벤츠와 걷기

내 일상에서 발견한 아이러니한 순간들


남자들의 심장을 설레게 한다는 삼각별의 로망이 몇 해 전 나에게도 설렘이 되었다. 강남에서 꽤 잘 나가는 광고 에이전시의 사장이던 나는 결혼을 앞두고 살던 내 집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대신, 예비 신랑의 차를 팔고 '뉴 카'와 함께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의 남자 친구인 지금의 남편에게 물었다. "어떤 차가 좋을까?" 남편이 대답했다. 

"나 사실 생각한 차가 있는데, SM6 어때?" 그때 남편은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사회생활 4년 차에 접어들던 시기, 대형병원의 계약직 연구원의 신분이었다. 

99학번의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14년 차에 졸업반부터 시작했던 사회생활과 합쳐 도합 15년이 넘는 해 동안 열심히 노동자로 살며 내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차 되던 해인 2016년의 어느 날. 우리는 뜻을 모아 만난 지 5개월 만에 벤츠의 오너가 되었고 6개월 차에 혼인신고를 하였다. 



"자전거 위에서 우는 것보다, 벤츠 안에서 우는 것이 차라리 낫다."
짐 캐리  


무명의 세월 동안 제 지갑에 문방구에서 산 1000만 달러(100억 원) 짜리 수표를 지니고 다녔다는 세계적 배우 짐 캐리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줄곧 '벤츠=성공'이라는 방정식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고로 은박지처럼 구겨져 폐차장으로 보냈던 박스카이자 첫차를 보낸 지 세 해가 지나고 나는 우리의 새 차를 벤츠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녀석은 마음에 쏙 들었다. 차 안에 들어서면 온갖 컬러 조명이 분위기를 잡아 주고 코너를 돌 때도 몸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나의 아니 우리의 출세를 우러러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사무실에 출퇴근하던 나는 정작 내 돈 내산 애마를 운전하기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몰던 차를 팔고 뚜벅이가 된 남편이 벤츠를 몰고 청첩장을 돌리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렇게 나는 나와 내 남편의 사람들에게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 마케팅을 하며 시작할 수 있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사업 5년 차의 데스벨리. 

직원 3명과 인턴사원 2명 나까지 도합 6명의 직원들이 하나 둘 제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인턴 둘을 내보고 3명의 직원과 일할 때 광고를 만들던 우리 셋은 똘똘 뭉쳐 새벽시장도 가고 가방도 팔고 옷도 팔았다. 최고의 모델을 캐스팅할 수 없기에 우리의 몸뚱이는 얼굴을 교묘히 피해 모델도 되었다가 쇼핑몰 MD도 되었다가 전천후 변신을 하였다. 몸매 좋은 친구의 지원 사격이 있었으나 판매는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타고난 천성 탓에 희망을 품고 매일 좋아요를 날리고 00스타그램을 올리며 점점 작은 핸드폰 속 세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때에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엄마라는 새로운 신분이 더해져 무서울 게 없었다. 

남들 잘된다는 것은 무조건 해 보자는 식이었다. 잘 되었다면 이 글 제목은 아마 벤츠와 마이바흐(?) 쯤 됐을 듯하지만 다행히도 결과는 실패였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쇼핑몰 운영은 젊은 친구들의 힙스타그램의 패기와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고 우리는 아니, 나는 미련스럽게도 일류 광고를 제작하던 완벽주의를 못 버렸다. 힘을 너무 주니 직원들은 지쳤고 나는 더 지쳐서 '장사를 관두자'는 이야기를 누가 꺼내는지 며 몇 달을 눈치게임을 했던 것 같다. 


"행복하니?"

".....".

"정리하자!"


어느 날 이야기를 꺼냈다. 직원들은 겉으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 외친 환호가 내 귀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느껴졌다.

벤츠를 몰고 다니던 남편은 결혼, 임신, 출산 과정을 겼는 2년 여의 시간 동안 6개월 간의 무직 상태를 거쳐 유망한 벤처 기업에 책임 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남편에게 전해 들은 벤처 기업의 신화가 무척이나 흥미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천조국 실리콘벨리의 성공 신화는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모두 차고에서 박스 위에 컴퓨터 한 두대 놓고 시작한 일, 즉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미국을 넘어 세계로 뻗쳐 나가는 모습을 전해 들으며 희망을 품었다. 


나는 그때 하루에 3시간을 자며 스케치북을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우리의 사업이 나라의 도움을 받거나 VC, 엑셀러레이터와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능성이 보였다. 14년 간 큰돈 벌며 해내 온 일이 R&D를 통해 기술로 꽃을 피우고 작은 창 하나로 한국을 넘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도 가고 미국에도 깃발을 꽂는 것이 꽤 구체적으로 가능할 듯 보였다. 


여차저차 6개월이 지나던 어느 날 나는 생전 처음 우리 통장 내역을 처음으로 자세히 확인해보아야 했다. 벌이가 없던 1년 6개월 간 매달 고정비는 3천이 넘었고 이대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6개월이 채 안되었다. 법인 회사의 CEO로 있으면서 내 월급을 지급하지 못한 것이 몇 달 째였다.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직원들을 제 날짜에 월급 주는 것만은 목숨처럼 하였다. 실리콘벨리라는 곳에 입성하기 위해 줄을 대고 파이프를 연결하던 내가 정작 나와 우리 회사는 녹슬고 망가져 곳곳에서 물이 줄줄 세고 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맛난 밥을 먹으며 직원들과 차를 마셨다. 



"저기, 너희들에게 미안한 말을 해야겠어. 나는 이 일에 끝을 보고 싶은데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기술도 필요하고 자금지원도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디지털 기반의 비즈니스로 전환해야 할 것 같은데, 흥미가 있다거나 비전이 보인다면 6개월 간 급여는 지금까지 수준으로 줄 수 있고 퇴사를 결정한다면 이직할 때까지 급여를 지급할 방법은 내가 찾아 볼게. 자유롭게 충분히 생각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자."


그리고 일주일 후 두 명의 직원은 조용히 다가와 제가각의 미래를 상의했다. 한 명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한 명은 대기업 입사의 포부를 밝힌 것. 그렇게 우리는 침착한 이별을 맞았고 나는 3개월 후 정확히 혼자, 사무실을 독점하게 되었다. 


두 명의 직원을 보내고 난 뒤 나는 수 일 동안 '내돈내산 벤츠'의 키를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는 했다. 짐 캐리 말대로 자전거 위보다 차 안이 훨씬 좋았다. 그가 무슨 뜻을 그 말을 했는지 우는 틈틈이 느껴져서 유치한 내 마음을 들킨 듯 틈틈이 웃음도 났다. 손만 대면 문이 열리는 센서가 나를 유일하게 받아주는 '세계'였지만 시동도 제대로 켤 줄 몰랐던 내가 벤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두커니 앉아서 추하게도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주차장에서 시동도 켜지 못하는 마흔의 여자가 혼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내 5년 차 법인 사업자는 데스벨리에서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나는 '하겠다는 일'을 찾고 품으며 인큐베이팅 하는 중이다. 역삼동 벤처타운에 자리한 국내 최대의 창업 거리에 한 쪽을 허가받고 집까지 4킬로가 조금 넘는 거리에 위치한 사무실에 매일 출근을 한다. 몇 달간 정신을 못 차렸던 나는 자주 이전 사무실에 가 있는다거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하는 당연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보통사람이었다.  


얼마 지나면 입주한 지 일 년째가 된다.  

두 달 전부터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걸어서 출근하고 있다. 벌써 4년이 지난 벤츠는 남편의 애마로 여전하고 나는 그 옆자리를 얻어 탈 수 있는 현실을 감사히 생각하는 자세가 되었다. 사업을 정리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이 원망스럽고 누군가 나를 막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나는 자주 괴로웠다. 망한 사장장님이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한다. 혼자 그런 생각에 꼬리가 물려 밖으로 나와 다시 걷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그런 사장님들에게 깨어나라고 말하고 같이 걷자고 이야기하는 일을 계속하며 일하고 있다. 

이런 자세를 잃어버릴 까 봐 걸어서 출근하는 내 발걸음을 찍어 두는 날이 많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와 출근을 하고 온라인에서 함께 미라클모닝이라도 하자고 외칠 수 있게 되기까지 도합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망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재 나온 기자님들과 고객분들에게 내뱉을 때까지 딱 그 시간이 들었다. 

또한 어떤 의미에소나 걷는 것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가 되었다. 일도 걷는 것처럼 아장아장가고 무거운 백팩을 메고 걸어서 간다. 앞길이 구만리지만 이젠 평가위원분들 앞에 90도로 절하며 다시, 뭘 잘해보겠다고 도와달란 이야기도 할 용기도 생겼다. 그동안 내 딸은 무럭무럭 자라 세 돌을 넘겼고 나도 이 아이와 함께 건강한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벤츠에서 우는 게 자전거 위에서 우는 것보다 았다는 아이러니가 내 일상에 딱 들어맞는다. 좋은 서비스를 갖추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면서 목적지까지 걷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벤츠도 팔고 집도 팔아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나는 남편 명의로 바뀐 벤츠의 보조석에 타고 퇴근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도 감사하다. 


*앞으로 irony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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