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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ca Prime Nov 17. 2020

존 덴버의 대구 매운탕

어머니와 아들의 노래

2007년 겨울은 최악이었다. 악명 높은 시카고 눈보라 속에도 반바지에 슬리퍼를 고집했던 내게, 텍사스의 어설픈 날씨 따위가 위협이 될 리 만무하다. 숨은 범인은 알레르기. 서부영화에 빠지지 않고 항상 떼구루루 굴러가는 그놈! 텀블위드(회전초)가 나를 미친 듯이 괴롭게 하는 주범이었음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당시 원인 없이 흐르는 눈물, 콧물, 재채기, 기침으로 번거로운 나날을 보냈다. 망가진 11월이 지나고 연휴와 새해 준비에 바쁜 12월 끝자락에, 반갑지 않은 손님, 감기 몸살이 내방 문을 두드렸다.


집 떠난 후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지난 삼 년간, 기후만큼이나 느긋한 캘리포니아 생활을 마치고 나니 풀어질 대로 풀어진 면역체계가 사주경계에 실패했음이 자명했다. 연말 휴가 신청은 해놨는데, 바로 일주일 전에 아프다고 드러누운 얼빠진 상병을 누가 예뻐할까? 한국 군대였으면 감기 쏙 달아나도록 선임들이 얼차려라도 주었을 텐데, 군의관이 써준 노트에 의지하여, 몸은 편하고 맘은 불편한 며칠을 보냈다. 그나마 같이 방을 쓰던 룸메이트가 훈련 수료를 일찍 해서 독방을 쓰게 되었기에  미안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줄은 셈이었다.




고열과 진통의 며칠을 같이 보내준 친구는 합법이 의심되는 용량의 Ibuprofen(이부프로펜)과 유튜브였다. 점호를 포함해서 모든 훈련에서 열외 된 팔자 좋은 상병은 드러누워서 컴퓨터를 뒤적거리는데,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릴 적 아버지가 폼나게 기타를 퉁기며 이런 팝송을 즐겨 부르셨지만, 영어를 모르던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타향살이로 텅 비고 추웠던, 몸만 훌쩍 커버린 소년의 마음에, 가득 차도록 들어온 그날 밤 그 노랫말은, 입김 하얗게 보이는 겨울날 호빵처럼 따끈하고 포근했다.


몇 번이나 돌려 들었을까, 나도 모르게 외워버린 가사를 읊어댄다.


"I hear the voice in the mornin’ hour, she calls me.

The radio reminds me of my home far way.

Drivin’ down the road, I get a feelin’

that I should’ve been home yesterday, yesterday.”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다  큰 사내의 거친 양볼에, 서러움 한 줄 그리움 한 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노래를 부르며  펑펑 울고 난 다음날에나 열이 내려 복귀했고, 그 뒤 며칠은 밤낮없이 그 노래만 흥얼거렸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휴스턴으로 경유하는 번거로운 비행이었지만, 가족과 애인을 만날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자정이 다 되어 내린 오헤어 공항에 부모님이 마중 오셨다. 덩치가 산 만한 아들 부여잡고 볼에 뽀뽀하시는 부모님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존 덴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Country 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아들, 무슨 노래인지 되게 서글프네?”


십 년 타향살이가 무색하도록 영어를 못하시는 어머니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서글프게 들렸나 보다. 팝송 세대셨던 아버지는 존 덴버를 알아채셨지만, 그날만큼은 어머니만 노래 너머 내 마음도 들으신 것이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이불을 펴는데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난다. 어머니가 크게 부르신다.


“아들 배고프지? 먹고 싶다는 대구 매운탕 끓여 놨어. 먹고 자.”


변변한 한국식당도 마켓도 없던 텍사스의 촌구석 생활에, 전화기 너머로 음식 투정을 했었던걸 마음에 두고 계셨나 보다.


빨간 국물에 하얀 생선살이 바글바글 끓어대는 얼큰하고 개운한 대구 매운탕의 향기는, 어머니 사랑의 향기로다. 먹는 내내 뽀얗게 김서린 안경 뒤로 눈물이 흘렀지만 어머니께 들킬세라 국물과 콧물과 함께  마셔버렸다. 족히 삼인분은 되는 매운탕을 고봉밥 두 그릇과 함께 뚝딱 비웠다. 부른 배에 두드리며 누운 침대의 포근함. 집이구나. 어제 왔었으면 좋을 뻔 한, 집이구나. 문샤인의 향은 없지만 자정 넘긴 시간에도 귀찮음 마다치 않으시고 아들 위해 끓여주신 어머니의 대구 매운탕 냄새가 있는, 집이로구나.




몇 해 전 부모님이 동부에 방문하셨을 때 어머니의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Country road, take me home…”
“잉? 엄니 전화벨, 존 덴버 노래네?”
“이~잉. (충남 예산 분) 난 이 노래가 좋더라고.”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어머니는 안다. 새벽에 그 큰 냄비를 뚝딱 비워낸, 당신 눈에는 한 없이 어리기만 한 아들내미가 그렇게 서글프게 부르던 노래는, 내내 부모님이 보고 싶어 눈물 흘리며 지낸 날의 노래인 것을, 어머니는 안다. 그 노래가 맘에 걸려, 전화 올 때마다 아들 생각하고파, 어려운 손전화를 더듬더듬 한참을 만져 전화벨 소리 해놓은 그 마음을, 못난 아들은 안다. 존 덴버의 노래와 칼칼한 대구탕의 맛은 영 어울리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얼큰한 찌개만 먹으면 존 덴버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한 못난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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