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는 ‘엄마 아빠 아들’, ‘아빠 딸’, ‘엄마 아들’, ‘엄마 딸’이 있다. 둘째는 곧 죽어도 아빠 딸이다. 오빠와 동생들이 아빠를 공격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아빠를 도와준다. 셋째보다도 힘이 없지만 아빠에게는 든든한 빽이다. 엄마가 아빠에게 핀잔을 주면 엄마를 나무란다. 무조건 아빠 편이다. 아버지 날 카드에 “최고 아빠 딸이"라고 적었다. 아빠는 최고가 아니지만 아빠 딸 에게는 최고이다. 그 이유를 얼마 전까지 몰랐었다. 어느 날 아내가 아빠에게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여보. 아빠 딸은 런닝맨 중에 지석진이 제일 좋대.”
“김종국이나 유재석이 아니고?”
“응. 지석진이 제일 좋대.”
왜일까? 명실공히 런닝맨 최약체인 지석진을 왜 좋아하는 걸까? 물론 지석진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특이한 취향이 너무나 궁금했다.
“아빠 딸은 지석진이 제일 좋아?”
“네. 지석진이 제일 좋아요.”
“왜 좋아?”
“불쌍하잖아요.”
명탐정이 아닌 아빠도 알 수 있다. 아빠가 불쌍한 거구나.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가 더 약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아빠 딸 눈에는 아빠가 제일 가여워 보이는 것이다. 왜일까?
가정이 생기고 아빠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군대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강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가정을 지키려면 강해야 한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았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여덟 살 꼬마의 눈에는 아빠가 세상 가여운 사람이다. 집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만큼은 강하게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등바등 버티는 모습마저 아빠 딸의 눈에는 가여워 보였던 것이다.
김종국을 좋아하지 않아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조금 실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딸에게 내 진짜 모습을 들킨 거 같아 좀 씁쓸하다. 아빠가 허풍 치며 버텼던 허상을 이 녀석만큼은 뚫어 봤다는 생각에 부끄럽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아빠는 허풍쟁이다. 아빠는 겁쟁이다. 아빠는 가장 작은 사람이다. 아빠는 그렇다.
아빠 편을 들어주는 딸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허풍쟁이로 살기로 했다. 겁쟁이가 아닌 듯, 크고 힘이 센 듯 계속 그렇게. 아빠 딸이 있으니까 아빠는 더 힘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