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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ca Prime Apr 22. 2021

바다에 버린 쓰레기

속 시원하게

네 살 막내가 요즘 배우는 게 많다. 숫자도 배워야 되고 존댓말도 배워야 하고 사 남매 사이에서 제 자리와 제 밥그릇을 찾는 것을 열심히 배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아이의 대화를 엿들었다.


"론싸끼는 엄마를 얼마나 사랑해?"

"저? 저는 엄마를 너무나 많이 사랑해요."

"언제까지 사랑할 거야?"

"꼐속 꼐속 사랑할 거예요."

"그게 얼마나인데?"

"오 분."


숫자와 시간이라는 개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제 딴에는 영원처럼 말한 것이 '오 분'이라는 대답이었다. 다른 이가 들으면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대답이지만, 딸을 잘 아는 엄마는 그 대답도 너무 좋은 모양이다.


퇴근길에 막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아빠?"

"론싸끼?"

"네. 저가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요 아빠 언제 와요?"

"아빠 지금 집 앞 슈퍼 마켓 앞인데?"

"그럼 얼마나 걸려요?"

"십 분"

"십 분?"

"왜 너무 오래 걸려?"

"네~~~"

"아 그럼 얼마나 빨리 갈까?"

"삼십 분!!!"


운전 하 핸들을 놓칠 뻔했다. 긴장 풀고 있을 때 훅 들어오는 펀치가 일품이다. 뭔가 알듯 하다가 말듯한 대답과 머리로 성립이 안 되는 비교 표현과  갑작스러운 일절의 장난 없는 진지한 발언에 수염 난 어른의 세계가 잠시 잠깐 흔들린 것이다. 한참을 깔깔 웃고 나니 어느새 집이었다.


어느 날은 컴퓨터 세상에서 열심히 모험을 하고 있는데 막내가 내 의자 위로 올라오더니 등에 찰싹 붙어 이런 말을 한다.


"아빠? 나중에 제가 커지면요. 나중에 아빠가 작아지면요 저가 아빠를 이렇게 불러도 돼요?"

"뭐라고 부르게?"

"야!"


그 뒤로 한참 사람들 사이의 호칭이 각자의 키와는 상관이 없다는 걸 설명해야 했다. 내가 키가 커서 아빠가 아니고 너는 작아서 날 아빠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고 설명은 하고 있었지만, 이게 통하고 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아이가 자라는 것,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일일까? 다른 사람이 먼저 걸어놓은 길을 가야 하고 그 길에서 이탈하면 손가락질당하며 애써 다시금 이유 없이 그 길로 걸어야 하는 것. 시간이라는 개념도, 존댓말이라는 체계도, 모두 내가 결정하기 전 누군가의 결정이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지켜야만 하는, 부조리라면 부조리라 하겠다. 이걸 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규칙, 매뉴얼, 규정, 온갖 그럴싸한 말은 다 갖다 붙여 놓았으니 이 길을 처음 가야 하는 이들의 실수가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한국 아이로써 미국에서 자라나 문화와 언어와 개념들이 충돌하며 이 네 살짜리 꼬마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말문이 막 트이기 시작한 무렵 너무 신기해하며 좋아했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막내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한참을 말을 더듬다가 아예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말 좀 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얼르고 달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건 너무 오지랖인가 싶어 생으로 맘 졸이며 지켜보던 어느 날, 장인 장모 방문 핑계로 모두 같이 바닷가를 놀러 가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탁 트인 푸른 태평양 같은 시원함은 없어도 넓게 열린 대서양을 바라보자니 한순간이나마 아이에 대한 걱정도 잊고 모래사장에서 즐겁게 놀았다. 일박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막내가 말을 했다.


"어저께 갔던데. 뭐예요?"

"응 그건 바다."

"아 바다. 바다 또 가자요."


나와 집사람은 한참을 어리둥절 아이를 바라보았다. 몇 주가 되도록 말을 안 하며 속 썩이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에


"그래 우리 조만간 또 오자."


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달 후 다시 방문해서 일주일을 얼굴 새까매 지도록 놀고 나니, 딸아이는 다시금 말을 시원시원 잘하게 되었다. 바다가 무슨 치료제인 것처럼 약을 파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이 녀석도 마음에 답답했던 것이 바다를 보고 놀면서 뻥 뚫린 게 아닐까 한다. 배움며 적응하는 고충을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바다에서 다 풀어 버린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 녀석은 우리랑 같이 방을 쓴다. 학교 들어가면 제 방으로 가야 한다고 늘 상기시키지만 좀처럼 학교 간다는 개념도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잠을 자고 생활한다는 개념도 잡히지 않는 거 같다. 잘거리에 열심히 양치질을 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꼬마에게 말했다.


"론싸끼. 너 학교 가면 이제 잠도 혼자 자고 화장실도 따로 써야 하는 거 알지?"

"왜요?"

"이제 그만큼 큰 거니까. 크면 그렇게 하는 거야."

"높(Nope!)"

"무슨 높이야! 언니랑 오빠들도 다 자기들 방 혼자 쓰고 혼자 씻고 하잖아. 너도 그렇게 해야 돼."

"전 꼐속 꼐속 엄마 아빠랑 같이 화장실 쓸 거예요."

"안돼. 언제까지 계속 쓸 거야?"

"꼐속 꼐속"

"그게 도대체 얼만데?"









"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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