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모님께 물려 받은 가장 큰 재산은 일명 '있어 보이는 것' 이다.
반면 가장 안타까운 점은 제일 큰 슬픔도 바로 이 점에서 온 다는것이다.
중학교 때 모두 도시락을 모여서 까 먹었다.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다. 여중의 깍쟁이들은 도시락통을 열며 반찬이 얼마나 정갈한지
얼마나 먹음직 스러운지에 따라 톤이 올라 가는 거 같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엄만 거의 평생을 직장인으로 사셨다.
그만큼 아침 시간은 늘 바빴고 오빠 까지 챙기시느라 늘 전쟁이었다.
그 시간에 아빠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덕분에 내 도시락 통의 반찬은 거의 마른반찬 이었다.
언제 두고 먹어도 문제 없을 것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멸치볶음, 고추튀각, 김... 등 김치는 기본 옵션 이었다.
학기 초, 앞에 앉은 여자 아이가 뒤를 돌며 말한다.
"밥 같이 먹자"
"그래. 좋아"
드디어 점심 시간. 책상 위에 하나둘씩 도시락을 올려 놓고 뚜껑을 여는데
친구가 나한테 웃으며 말한다.
"넌 꼭 바이올린을 들고 다니게 생겼어. 그 모습이 잘 어울려. 근데 그게 도시락 통 일거 같아"
꺄르르르ㅡ 주변 친구들이 같이 웃는다.
여기서 내 감정이 무언지 단번에 알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선, 이 말의 뜻이 무언지 헷갈리고,
모두 웃을 때 화를 내면 난 그때부터 왕따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무리란 그런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고 몰아가면 몰린다.
"바이올린 만져라도 보고 싶다. 꺄르르르르"
내가 선택 한 건 같이 웃어 넘기는 거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 오는 내내 그 아이의 말을
곱씹었다.
이 모든 것은 그넘의 도시락 반찬 때문이었다.
볼품 없는 고추튀각! 아이들은 내 반찬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대체 이게 무엇이냐며 말이다. 지금도 어떤 이에겐 낯선 반찬이 그때도 생소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여중생의 도시락 찬으론 말이다.
다행이도 도시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학교가 급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급식은 이렇게 여럿을 살린다. 아침시간의 귀한 나의 엄마도, 있어 보이고 싶었 던 나도 말이다.
있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운 건 계속 되었다.
대학교 졸업반 일 때, 친구의 소개로 남학생을 소개 받았다. 깔끔한 매너에 단정한 용모, 거기에 본인 학업에 대한 열정까지 멋져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는 나를 사랑많이 받고 자란 딸 같다며 밝은 기운이 좋다고 그랬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우린 단 둘이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져야 할 무렵,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집 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집을 묻고 발걸음을 향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시 우리집은 서울이긴 하였으나, 외진 주택가이며 그 중에서도 좀 낡은 빌라 지하 1층 이었다.
지금까지 잘 도 '있어보였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까발라질게 분명했다. 나는 나의 집에 자신이 없었다.
내 도시락통 안의 반찬을 숨기고 싶었던 것처럼 그 날 나는 내 집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거절하지 못한 채 결국 집 앞 까지 왔고, 이제 인사만 남았다.
"잘가, 데려다 줘서 고마워"
"여기가 네 집이구나? 여기 몇층에 살아?"
"어..! 나 여기 3층"
"그래, 알겠어. 연락할께."
"응"
"먼저 들어가"
"아냐 먼저 가"
"아냐, 너 먼저 들어가"
순진한 대학생 오빠는 내 의도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들어가야 이 시간이 끝이 날 것 같다.
"타다다닥"
나는 잽싸게 뛰어 3층으로 올라갔다. 늦은 시간 야박하게도 계단 조명이 들어온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화들짝 놀라 복도 창 너머로 밖을 둘러 봤다.
웃으며 환하게 손을 흔들고 서 있다.
'제발 가라. 제발 가! 난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단 말이다..'
집으로 들어 가는 척. 계단 구석에 몸을 낮추고 숨었다.
'픽' 하고 계단의 조명이 꺼진다.
'이젠 갔겠지..' 얼마나 지났을 까. 한참을 쪼그려 있다 가 계단을 내려와 지하 우리집으로 들어갔다.
"늦었네"
퇴근 한 엄마가 반긴다.
아무렇지 않게 환한 거실이 짜증난다. 이 집안에 나만 유난인거 같아 슬프면서도 억울하다.
"제발 이사 좀 가자. 응? 우리도 제발 이사 좀 가자"
"얘 또 이러네"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난 이 지하 빌라에서 살았다. 내가 이사가자고 처음 졸랐 던 시기는 대학에 가서이다. 그건 성인이 된 그날까지 이루지 못했다.
있어 보이는 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이 본의 아니게 란 것이다.
있어 보이는 외모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나, 묘하게 난 그들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호감을 건넨 그들을 만족 시키려면 난 있었어만 했으나, 난 본의 아니게 늘 없이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늘 저소득층 지원금을 수령하고, 대학교도 학비에 맞춰 가야만 했다.
(내 대학 입학 고지서를 들고 치열하게 싸웠던 부모님을 기억한다.)
나는 어쩌면 그 도시락 통을 열었 던 처음 그 날 처럼 모순 된 삶을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있어 보이는' 멀끔 한 외모 덕에 나는 열심히 발을 휘저었다.
그들의 호감에 맞춰 살기 위해 구부리고 꺽어가며 열심히 틀에 맞췄다.
누군가는 잔잔 한 호수 위를 유영하는 백조의 발을 비웃겠지만
나는 그 발이 꼭 내 인생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백조가 좀 더 편안히 유영하며 그 호수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발을 멈추고도 무난한 하루가 올 수 있을까? 아마 호수를 벗어나야 그제서야 쉬겠지.
그게 꼭 나한테 하는 경고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다시 마른반찬 몇개 뿐인 도시락 통을 내밀 던 그때의 내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