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UX는 디자인이 아니니까요.
기획자로 일을 하다 보면 기획자의 전문성을 항상 의심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UX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타이틀 자체에서 오는 오해이기도 하고, UX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선 타이틀에서 오는 오해는 기획자들은 보통 '서비스 기획자', 'Product Owner', 'Product Manager'라는 직함을 달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사실 타이틀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을 잡기가 힘들다. 심지어 저 3가지 타이틀마다 하는 업무가 다르다. 그리고 같은 타이틀이어도 회사마다 관여하는 범위나 직무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기획자 또는 PM, PO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타이틀만 가지고는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그러니 UX를 담당하지 않는 기획자들도 있고, 담당하더라도 그 전문성을 항상 의심받는다.
반면에, 디자이너들은 UX/UI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른 명칭으로도 타이틀이 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서비스 기업의 디자이너라면 UX/UI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실제로 UX와 UI 업무를 담당해서 디자인을 한다. 그래서 타이틀에서 오는 혼란이 기획자에 비해서 적다. 그리고 이렇게 타이틀에 'UX'가 있으므로 해서 UX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을 디자이너들은 요구받는다.
UX는 과학이다.
'UX는 디자인이 아닙니다. UX는 과학입니다.'
모 침대의 광고문구가 떠오르지만... 진짜다 UX는 과학이다. 그것도 요즘 정말 핫한 인공지능과 뿌리가 같다.
(UX의 개념 설명 - 도널드노먼이 만들었고, 인지심리, 인지과학으로부터 시작됐다.)
기획자가 담당하고 고민해야 하는 UX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이다. HCI와 인지심리학의 바탕을 둔 사용성을 고민하고 그것을 비즈니스의 요구사항을 잘 반영해서 서비스에 잘 녹이는 설계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자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데이터를 공부하고, 컴퓨터를 이해하기 위해 기술을 알아야 한다. 가령 버튼에 넣는 마이크로카피를 하나 결정할 때도 해당 서비스의 메인 타깃의 연령, 성별, 사용언어,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데이터를 기반해서 의사결정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서비스에 들어가는 기능(feature)에 기술적 한계와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잘 고려하여 기능들의 배열과 서비스의 구현 수준을 결정해야 한다. 모든 기획자가 나처럼 컴퓨터과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이 분야의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기획자라면 UX를 설계할 때만큼은 저런 관점에서 이를 고민하고 설계해야 한다.
인지심리학의 바탕을 둔 UX의 사례를 하나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증번호들이 있다. 인증번호는 보통 6자리 숫자나 길어야 8자리 숫자가 오는데 이렇게 6자리에서 8자리 숫자가 인증번호로 오는 것은 인간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숫자는 7±2개이기 때문이다. 이는 프린스턴대 조지 밀러 교수가 연구한 1956년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인데 인지심리 분야에서는 워낙 클래식이라 이미 모두가 알고 있고 모르더라도 이미 실생활에서는 너무 많이 쓰이고 있는 이론이다.
관련 연구로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한 청크화 연구도 있는데 인간이 기억을 잘하기 위해서는 4개의 단위로 정보의 양을 나눠서 외우면 훨씬 많은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번호나 신용카드 번호 같은 것들은 모두 4자리씩 끊어서 번호가 표기된다.
전화번호를 아래와 같이 표기하면 기억이 잘 된다.
0212345678 -> 02-1234-5678
디자이너는 기획자와는 달리 UX의 시각적인 부분들을 고민한다. 심미성, 색의 대비, 명도 대비, 텍스트의 가독성과 주목성 등 많은 시각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는 부분을 관여한다. 이런 것들의 전문성은 미술을 전공한 시각디자이너 출신 디자이너들의 전문성이 꼭 필요하다. 적어도 관련 수업을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고 이런 부분의 전문성은 기획자들이 고민하지 말아야 하고, 흉내 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UX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있는 것들은 우리 인간의 감각과 지각, 인지 능력과 깊은 연관이 있고 높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과학의 영역이다. 태생적으로 UX는 다학제 간 연구에서 탄생한 개념이고, 어떤 하나의 영역을 잘하는 전문가가 모두 담당할 수가 없다. UX는 기획자, 디자이너, 심지어 개발자까지도 모두 관여하고 함께 고민하고 향상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개발자는 생각보다 훌륭하게 UX를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오늘 한 이야기는 자주 언급되는 기획자 무용론에 대한 한 부분의 이야기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으로 들었던 이야기 "그냥 앱 설계 디자이너가 UX/UI 다하는데 기획자가 필요해?"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적어보았다. 적다 보니 디자이너분들이 데이터를 다루는 데 있어서 혹은 HCI에 관한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없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연히 디자이너분들 중에도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많이 하시고, 역량이 많으신 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UX가 디자이너들만의 전유물로 생각되고 기획자의 UX 전문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금은 바꾸고 싶어서 글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