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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카피 Jan 26. 2023

027. 아이의 낭만 키우기

오늘은 눈이 오니 걸어서 가자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며느리 김아려가 큰아들인 분도에게 어미의 정을 과도하게 베푸는 일을 나무랐다. 조마리아는 아이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스스로 즐거워하도록 키우라고 며느리에게 일렀다. 김아려는 겨울에도 아이를 아랫목에 덮어두지 않고 대청마루에서 놀게 했고, 여름에는 벗겨서 길렀다. 아이는 맨땅을 기면서 흙과 풀을 들여다보았고 봄의 냄새와 가을의 냄새가 다름을 알았는데, 아이는 아직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아이의 앎은 혼자만 아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머리를 꽁 맞은 기분이었다. 요즘 날이 춥다고 집 안에만 있던 게 사실이었다. 썰매장에 가려다 영하의 기온이라고 접고 어디 좀 외출하려다가도 바람 분다고 접고 그랬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니 주변에서 누가 애들 데리고 어디 다녀왔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속도 상했다. 왜 우린 날씨가 안 도와주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데 다시 더듬어 생각해 보니 집 안에 있자는 결정을 한 건 나였다. 날씨가 너 집에 있어야 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눈썰매장 잠깐 나갔다 온다고 아이가 독감에 걸려 꽁꽁 앓아누울 것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저녁 식탁에서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주말에 사람이 많고 운전을 오래 해야 해도 계절마다 아이들이 경험해야 할 곳은 꼭 가야겠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느낌을 알게 하는 건 부모 몫인 거 같아."

차 밀리는 거, 북적이는 거 딱 질색인 양반이 이런 말을 하다니...! 


우리 아이들은 더운 날씨를 신경 쓰지 않는다. 더위를 잘 참는 내 영향이 좀 있을 것이다. 폭염이 아닌 이상은 밖에서 땀 흘리고 노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내 영향 말이다. 반면에 추운 건 싫어한다. 내가 그렇다. 나는 찬 바람이 불면 실내에서 어찌어찌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하얼빈의 구절을 보고 아차 했다. 내가 추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아이들까지 겨울=추위라고 생각하게 되면 안 될 텐데. 


새벽부터 눈이 솜털처럼 내리는 아침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까지 차를 타고 가겠다는 둘째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이 너무 예쁘니까 오늘은 눈 구경하면서 가자."

처음에는 손이 시리다며 추워 추워하던 아이는 이내 발바닥에 느껴지는 보드득한 감촉을 즐거워했다. 

"눈이 보드라워 그런데 뽀득뽀득해. 꺄아."

눈이 부서지는 모양과 날리는 모양, 밟았을 때의 감촉들을 신나 하던 둘째는 손이 시린 것도 잊은 듯했다. 발자국이 없는 눈을 따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어린이집에 살짝 늦었다. 대신 아이의 마음에 살짝 날리는 눈이 얼마나 예쁜지 새겨졌으니 그걸로 행복하다. 아이도 나도. 


오늘은 이런 낭만들을 쌓아주기 위해 엄마인 나는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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