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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징 Jun 30. 2023

밀린 설거지. 밀린 원고.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230128



아침 8시. 알람이 울린다. 머릿속에선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아침도 먹고, 설거지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가득하지만, 몸은 좀처럼 일어나지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니 오전 10시. 두 시간이나 더 잤지만, 그다지 몸은 개운하지 않다. 꾸역꾸역 일어나서 간신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곤 하루 대부분을 멍하니, 혹은 잠을 자며 보냈다.      


연휴가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나의 생활 패턴은 엉망이 되었다. 저번주까진 그럭저럭 제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이게 흐름이 끊겨서인지 무엇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의 연속이다. 마냥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하고 흘려보내면 그만이고, 나도 그렇게 편하게 마음을 잡아보려 했는데, 사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사로잡는다. 밀린 원고가 눈앞에 자꾸만 아른거린다.      


웹 소설 작가인 나의 하루는 원고와의 싸움으로 시작해 원고와의 싸움으로 끝난다.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켰고, 원고 창을 띄웠다. 쓰다 만 글이 눈에 보인다. 아주 길게 길게 끌어왔던 글이고, 이제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써야 할 분량은 미리 틀을 잡아놔서 다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써지는 건지. 심지어 이 전에 쓴 글까지 죄다 구려 보이는 이른바 ‘내글구려병’이 발발한 나머지 원고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아. 이걸 계속 쓰는 게 맞나? 때려쳐?     


그렇게 허송세월 하루를 보냈다. 원고에 집중하겠답시고 대량으로 끓여둔 카레 덕분에 (나는 마감이 다가오면 카레를 왕창 끓여놓는 습관이 있다) 밥은 어찌저찌 안 미루고 때에 대충 맞춰 먹었다. 해는 진작 진지 오래고, 트위터엔 퇴근한 친구들이 속속들이 나타나 불금의 밤을 보내기 시작한다. 아. 젠장. 나는 오늘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루가 이렇게 끝나다니.      


이제는 정말 밀린 일을 해야만 한다. 밀린 것은 비단 원고뿐만이 아니다. 집안 꼴도 엉망인데, 일단 밀린 설거지부터 해야했다. ‘하기 싫어 죽겠다. 내일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고무장갑을 꼈다. 무기력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거지부터 하는 게 좋다는, 어디선가 들었던 조언을 머리에 되뇌면서.      


싱크대 한가득 쌓였던 설거지는 막상 시작하니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알고 보니 큼직한 것들이 부피만 차지하고 있어 많아 보였던 것이다. 큰 것들을 먼저 씻어 정리하고, 작은 것들을 씻고, 배수관에 낀 음식물 쓰레기까지 정리하고 나면 끝. 금세 깨끗해진 싱크대를 보니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 뭐 대단한 것이라도 한 것마냥 트위터에 ‘설거지 다 했다. 난 어른이다.’하고 올렸고, 친구들은 이 별것도 아닌 말에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자리에 앉았다. 이젠 가장 중요한 나의 밀린 일을 마무리할 차례다. 원고는 여전히 구려 보였고, 여전히 난 할 의욕이 안 생긴다.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유튜브에서 원고용 플레이리스트를 켜고, 꾸역꾸역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해본다. 미리 잡아뒀던 틀을 이리저리 다시 배치해보기도 하고. 중요한 대사를 미리 써보기도 하면서.      


그랬더니 하나둘 진도가 나가기 시작한다. 손가락도 키보드 위에서 제법 잘 굴러간다. 좀처럼 막혀서 안 써지던 부분을 과감하게 지우고 새로 쓰기 시작했더니 막힌 배수관이 뚫려 물이 내려가듯 장면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장면을 쓰고, 대사를 다듬고, 맞춤법을 확인하고, 어색한 문장을 고쳐 쓰고 나니 새벽 2시 30분. 드디어 한 화가 마무리되었다. 빼곡하게 적힌 ‘오늘의 할 일’ 중 하나에 당당하게 빨간 펜으로 체크 표시를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원고를 하는 방식도 설거지와 모양새가 꽤 비슷하다. 큰 설거짓감을 먼저 해치우듯 굵직한 장면과 대사를 먼저 쓰고. 자잘한 것들을 해치워 나간다.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듯 이상한 문장과 단어를 지우고 고치면 설거지도, 원고도 완성. 이걸 무한히 반복해 나간다. 지겹다. 뿌듯하기도 하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무기력에 시달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미뤄왔는지 돌이켜본다. 완결이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하면 되는데 왜 그게 그토록 손에 잡히질 않는지. 이것도 어쩌면 설거지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한 번 힘들고 어려워서 미뤄버렸더니 온갖 그릇이 그 위에 쌓이고 쌓이는 것처럼 마음의 부채감도 점점 쌓여온 모양이다. 싱크대에 쌓인 거대한 설거지가 엄두가 나지 않아 차라리 외면해버리고 싶은 것처럼, 완결에 대한 부담도 외면해버리고 싶다. 시간이 차일피일 미뤄지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해야지. 설거지는 밀리면 냄새가 나고, 쓸 그릇도 없어질 테고, 원고는 밀리면 출간이 미뤄지고 압박은 더 커질 거다. 미뤄둔 원고가 마침내 완결의 마침표를 찍을 때, 그 뿌듯함은 밀린 설거지를 해낸 것보다 더 크리라 믿고, 지금의 부담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설거지통 밑에 낀 음식물 쓰레기를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내 원고의 결과물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아마...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 완성되어 있겠지?          


하지만 말이 쉽지. 사실 오늘도 설거지는 미루고 싶고, 원고는 보고 싶지 않다.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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