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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Mar 15. 2020

현재를 결정한 과거의 한 순간

친절한 맑음씨 이야기

(배고파) 서럽고, (일한 만큼 돈 못받아) 억울했던 이야기를 했더니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일당한' 사람으로만 살아온 것 같아 이번에는 다른, 어쩌면 행복했던 '일'의 기억에 대해 써볼까 한다.


현재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지속했던 일. 그 일은 다름아닌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롯데리아 메이트였다. (맥도날드와 버거킹은 '크루'라 부르고, 롯데리아는 '메이트'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후 처음 갖게된 파트타임잡이었다. 총 일한 기간을 합하면 약 4~5년정도?(와우!! 4~5년을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라니...... 그 주인공인 나인데도 내가 놀랍다) 나는 물건에는 싫증을 잘 느끼는데, '일'과 '사람'에 있어서 아주 오랫동안 깊게 만나는 편이다. 다만 '사람'과 많이 친해지기 까지, '일'을 내것으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리는 편.


여하튼 롯데리아 메이트라는 경험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해온 '일'인 만큼 나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일의 경험'이기도 하다. 롯데리아에서의  '일'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다양하고 스펙타클해서 앞으로도 여러번 쓰게 될 것 같은데. 오늘은 어깨 뿜뿜했던 기억을 풀어 나람 사람에 대해 자랑질 해보려고 한다.


누구나 리즈시설을 꼽으라면 20대를 빼놓지 못할 것인데, 그런 시기의 롯데리아에서의 기억은 아주 아름답게 채워져 있다. 일이 재미있었고, 함께 일하는 이들과의 사간이 즐거웠다. 물론 연애의 기억도 빼놓지 않을란다. 이런저런 이유로 롯데리아에서 나는 얼마나 즐겁게 일했던지 서비스업이 내 천직인 것 같아 개인적인 사정으로 또 한번의 다른 수능을 치른 후 대학교를 다시 들어갈 때  '관광경영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했다. 점수에 따라 학교부터 선택 후 그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말이다. 요즘도 대학교 선택은 전공이 아니라 학교부터 선택하겠지?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회사의 부장님들이 연말이 되면 누구팀장 딸이 서울대에 갔다더라, 어느부장 아들이 연세대에 갔다더라 등의 말은 들어봤어도 어느과에 갔다더라는 못들어 봤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나의 적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전공을 선택했고, 그 전공이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첫 정규직 직장은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했고, 지금도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서 일을 한다. 나는 가끔 나의 첫 파트타임잡으로 롯데리아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시간을 되돌려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한가지의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의 적성에 대해 더 신중히 생각해보지를 못했다. 더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해보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젊은이들에게는 경험이 중요하다. 젊은이들이여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시기를 당부드린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자. 전공선택(결론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까지)에 영향을 끼친 롯데리아 메이트의 '일' 경험이 왜 나로하여금 서비스업이 천직이라고 느끼게 만들었을까?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랬더니 어느 한순간이 떠올랐다. 나의 어깨를 뿜뿜하게 만든 시점.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햇살이 눈부신 어느날 이었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지만 이날은 분명 화창한 5월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결정된 날인 것만 같아서다. 날이라도 좋아야지. 1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IN타임 근무 중이었다.(쓰다보니 떠오른다. 롯데리아는 아침근무를 UP, 오후 근무를 IN, 저녁 마감 근무를 DOWN 이라고 했다.) 앞서 말한바 있지만 나는 일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나는 즐겁게 웃으며 내가 바로 친절의 표본이다라고 생각하며 일했다. 내가 웃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웃고, 손님이 웃고 다같이 즐거운 날. 그날의 기억은 그렇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오세요!" 정해진 멘트였지만 할 수 있는 즐거운 감정을 잔뜩실어 인사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은 더 신이나서 일했었나보다. 점장님이 점포 바깥을 살피고 들어오시더니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주셨다. 본인이 햇살도 좋고 점포앞도 살필겸 한참을 바깥에 있다가 들었다며.


저기 밖에서 딸이랑 있는 여자손님 보여?

저분이 방금 딸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기분이 너무 좋다.

저분이 일하고 있는 너를 가르키면서 딸에게 하는 말이

"저기 너무 예쁜(강조하고 싶다) 아르바이트생 보여?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덩달아 내 기분이 너무 좋았어"

라고 딸에게 말을 하더라.

뭘 어떻게 했어?



뽕 넣은 마냥 어깨가 하늘로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약 10년도 더 후에 유행한 어깨뽕 패션(파워숄더, 피콕숄더 라고 하더군요)이 절로 내 어깨에서 구현됐다. 그 이야기를 점장님으로부터 전해듣는데 기분이 '좋음'을 넘어서 귓가에는 마치 이상형을 만났을 때? 또는 천사를 만났을 때?나 들릴듯한 음악이 플레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서비스업이 내 천직이구나...... 내가 베푼 친절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구나'라고 말이다. 이때의 경험이 구직활동을 할 때 나의 자기소개서에도 반영됐다. 내 인생 전반에 있어서 이날의 기억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쳐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20년 된) 나름 솔직하게 쓴 자기소개서

  

그냥 '성격이겠지' 라고 치부할 때도 있긴하다. 욕먹기 싫어하고 잘했다고 들어야 더 힘내는 그런 성격, 무엇이든 잘해내려는 과하게 의욕적으로 하는 성격 등등. 그러한 성격이었기에 그러한 경험을 했겠지라고. 그러나 경험이 너무나 중요하다데에는 이견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어린아이들, 청소년들, 청년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경험이 오랫동안 밥먹고 사는 직업으로 이어진 나의 사례가 비단 나에게만 있지는 않을터이다. '일' 경험이 너무 없어서, 또는 잘못된 '일'의 경험으로 인해서 현재를 너무나 후회하는 사례도 비일비재 할 것이다.(나는 땅을 치며 후회하는 정도는 아니고, 그냥 더 많은 경험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정도의 미련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라는 것, 아직 직장, 직업이 정해지지 않은 학생들에게만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커야하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120세까지 살아야하는 지금 이 시대, 60세에 퇴직하고 또다시 60년을 더 살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지인의 딸이 지인에게 묻더란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아직도 더 커야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심하게 당황한 지인은

"글쎄... 엄마가 뭐가 되면 좋겠어?"

라고 되물었단다. 그랬더니 딸이

"너무 급하게 결정하려고 하지마. 뭐든지 엄마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거야"

라고......


나는 딸이 한 말도 너무나 신선했지만, 우리 모두는 계속 커가는 사람, 되어가는 어른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렇지! 내가 앞으로도 쌓아야 할 경험이 많구나. 지금 이 직업과 일이 마지막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번에는 사장님이 아닌 나에게 그리고 이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말해본다.

 "몇살? 혹시 120살? 다 자랐다고 착각하지마세요. 아직도 더 많은 삶을 살아내야 해요. 지난 경험이 비루하다고 왜 더 큰물에서 놀지 못했냐고 자책하지 마세요. 아직 나가서 놀아야 할 물이 널렸어요"

 



+번외+

롯데리아에서 파트타임을 할 때 거기를 직장으로 삼을까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버거킹이 더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매장인테리어도, 직원들 유니폼도 심지어 햄버거 이름조차도 버거킹이 WIN!


파란모자는 아무나 쓰는게 아님. 시급도 더 받는 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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